하늘은 지겹지도 않은 모양이네요. 오늘도 잔뜩 찌푸리더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어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 한 잔을 창가에 놓고 앉아있어요. 한여름에 무슨 뜨거운 커피냐고요? 모르는 소리 마세요.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왜 생겼습니까? 한여름에 먹는 뜨거운 커피 맛을 알면 그 매혹적인 맛을 끊기 힘들어져요. 암튼,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다가, 턱을 괴고 앉아서는 창밖 풍경에 빠지고 말았지요.
사실 창밖 풍경을 본다고 해도, 시선이 그곳 방향인 것뿐이지, 딱히 보는 건 없어요. 그냥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시선이 되어 이리저리 헤매다가 물음표 하나 동동 뜨면 그것 따라 움직이지요. 늘 그렇듯 물음표가 뭐든 간에, 뭐 그리 대수로운 고민이겠어요? 기껏해야 아파트 옥상에 사는 텃밭상자 속 식구들 걱정이나 하지요. 길고 긴 음울한 날씨 탓에, 뭐 하나 제대로 자라나는 게 없으니까요.
건강하게 자라던 꽈리고추는 서서히 병들어가고, 오이고추는 붉게 익어가다가 고추 꼬투리 끝이 허옇게 말라가다 못 해 물러 떨어져요. 어찌어찌 버틴다 해도 장마 아닌 장마에 견디지 못하고 살이 터서 흉이 지나치니 볼 성 사나워요. 식욕을 올리기는커녕 식욕을 반감시키는 오이고추입니다. 윤기 자르르 흘러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던 오이고추는 온데간데가 없어요. 매운 것을 못 먹는 탓에, 붉게 익은 오이고추를 몹시나 좋아하는데 한 해 고추 농사를 망쳤어요. 거기다 가지까지 꽃이 펴도 수정이 안 되니 고운 보랏빛 꽃만 폈다가 떠나고, 그 많던 꿀벌들은 다 어디 갔는지 요즘은 통 보이지도 않아요.
이런 지경인데 칠팔 년을 텃밭상자 농사를 지었지만, 까치와 까마귀가 번갈아 나타나 내 농장물을 먹어 치우는 건 처음 겪어요. 아파트 바로 옆이 둘레길인데 산에 들에 먹을 게 천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올해 농사 망친 것처럼 산과 들에도 꽃은 어찌어찌 피지만 열매가 안 맺히는 모양이에요. 그러니 오가다 봤던 내 텃밭상자가 그나마 먹을 게 보여 날아드나 봐요. 거기다 아마, 까치와 까마귀 세상에 제 텃밭상자가 맛집으로 소문이 난 모양이지요?
어려운 세상 만났으니 서로 나누어 먹으면 좋지요. 문제는 방울토마토 하나 따 먹기 위해 뾰족한 그 입으로 먹기엔 마땅치 않아서인지 한 개를 먹기 위해선, 대여섯 개의 방울토마토가 아파트 옥상 바닥에 나뒹굴게 된다는 거지요. 엉망인 날씨에도 그나마 익어가던 고추도 까치와 까마귀가 먹습니다. 고추나무 아래서 뾰족한 부리로 빨갛게 익은 고추만 골라 콕콕 찍어 고추 끝을 뜯어먹어요. 내 평생 칠십이 되도록 까치와 까마귀가 고추 뜯어먹었단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는데, 이 무슨 일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어제는 급기야 마요네즈랑 물을 섞어 들고 아파트 옥상에 올랐어요. 텃밭상자에 심어 놓은 호박이 요즘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거든요. 어르고 달래며 갓난아이 키우듯 호호 불어가며 키웠는데 그 호박 잎사귀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어요. 정확한 병명은 흰 가루병이라는데 건조와 다습이 반복될 때에 발병률이 높다고 해요. 그놈의 하늘 변덕에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왔다 해가 났다를 반복하니 병에 안 걸리면 그게 더 이상하지요. 안 그래요? 원래 하던 나만의 농법대로 그냥 뽑아 버릴까? 하다가, 마요네즈 희석액을 뿌리기로 했어요. 보통은 계란 노른자에 물을 섞고, 다시 기름을 넣고 섞는 것인데 그게 귀찮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이라네요. 해서 어차피 마요네즈를 그렇게 만드니 마요네즈를 쓰는 거지요.
오늘 아침엔, 일어나자마자 아파트 옥상에 올랐어요. 당연히 호박에게 먼저 달려갔어요. 나를 본 호박꽃 세 송이가 피어 반갑다고 손짓했어요. 살려줬다고 반가워하는 모양인데요. 그래도 마요네즈 희석액이 호박 잎사귀에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가 더 궁금했어요. 호박꽃에게 아침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호박잎부터 들쳐 보느라 바빴어요. 다행히 호박 잎사귀들이 싱싱하게 살아나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네요. 내 입이 저절로 벌어지며 웃었지요.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런데 5일마다 서너 번 주고 나면 다시는 호박 잎사귀에 하얀 곰팡이가 안 필까요? 지금 내 머릿속은 온통 그런 물음으로 가득 차 있어요.
이런이런! 찌푸렸던 하늘에서 다시 장대비가 쏟아지네요. 잠깐 햇살이 구름 사이로 보이길래 날씨가 개는가? 싶었는데 말이에요. 이쯤 되니 문득, 하늘이 궁금해져요. 하늘은 지난 두어 달 동안 속으로 어떤 생각하는지? 어떤 고민이 있기에 매일매일을 얼굴을 찌푸리고 비를 뿌려대는 건지? 그 흔하디 흔한 햇살은 어디에 감춰두고 안 보내주는 건지? 내 눈에 비치는 하늘은 어차피 겉만 보게 거든요. 내면이야 볼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하늘 속을 보려고 해도 어차피 보이지도 않고, 묻는다고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우리 관계니까,
사실, 텃밭상자 식구들이나 하늘의 안부보다야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건 당신이 안부입니다. 풍문에도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 건 혹시 당신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걸 아닐까? 이건 궁금증을 넘어 당신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지요. 나이 든 탓인지? 아니면 내가 미워져? 그 어떤 일로 인하여, 소식도 들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건지?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끝없이 이어져 목구멍을 기웃대는데, 물어볼 수가 없어요. 당신을 찾아 나서면 못 찾을 것도 없겠지만 나이 드니 그런 것도 치기란 생각이 들어요.
이 생각 저 생각에 잠들지 못하다가 선잠을 자고 깨어보니 새벽 3시 30분! 세상에 귀뚜라미가 창밖에서 울더라고요! 이 서울 한복판에서 귀뚜라미가 떼로 우는 소린 처음 들었어요.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 아닌가 봐요, 모두들 묻고 싶은 말들을 너도나도 쏟아내는 모양이에요. 나도 그 속에 끼어서 궁금한 말들을 쏟아냈어요. 당신은 지금, 꿈속을 걷고 있을까요? 아니면, 당신도 지금 날 생각하며 잠들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쿡쿡 웃기도 했어요.
아직도 당신이 내 마음자리 땅, 몇 평을 자리하고 있음에 늘 감사함을 느끼지요. 그런 것도 없으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둘 줄어가는 노년을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그 말을 믿으며 그 새벽,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