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름을 불러주세요
예전에 이런 수수께끼가 있었어요.
“분명 내 것이지만, 나보다 남이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바로 ‘이름’입니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나이와 관계없이 서로 이름을 부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 들면 남도 내 이름을 많이 사용하지 않지요. 특히 여성은 직장생활을 하지 않으면 결혼 후 바로 아무개 엄마로 불리다가, 손주가 생기면 아무개 할머니로 불리게 되잖아요?
물론 외국의 경우도 결혼하면 서로를 이름보다 ‘허니(honey)’, ‘달링(darling)’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건 그 어떤 누구도 그렇게 부를 수 없는 둘 만의 애칭이라서, 서로를 더 친밀하게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지요. 마치 우리가 ‘여보’, ‘당신’하고 부르듯이요.
생각해보세요. 부부 사이도 아닌데, 남이 나를 ‘여보’, ‘당신’이라고 부르거나 ‘허니(honey)’나 ‘달링(darling)’이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
그러니 이런 부부간의 호칭이 아니고서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내 이름으로 불릴 때 비로소 나 자신을 자각하게 됩니다.
실제 어떤 분이 평생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뭘 배우기 시작했는데, 거기서는 강사와 수강생 모두 서로를 ‘아무개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요. 그래서 자기보다 젊은 강사의 입에서 처음 자기 이름을 들었을 때는 무척 낯설었는데, 지금은 자신을 되찾은 느낌이 들어서 참 좋다고 하시더군요.
시인 김춘수는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고 했지요.
이름이 이렇게 참 중요합니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세상에 널린 보통명사이던 것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는 고유명사, 그것도 내 마음에 아주 아름다운 고유명사가 되니까요.
나이 들어도 내 이름으로 많이 불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아무개 엄마’, ‘아무개 할머니’도 좋고, ‘아무개 부인’도 좋은데요. 그 ‘아무개’ 없이도 나 자신으로서 당당하게 생활하면서 인정받으면 더 좋겠지요.
실제 윗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게 터부시 되는 우리 문화에서는, 윗사람과 인간관계를 맺는 데 경직될 수밖에 없는데요. 가령 모임에서도 “어르신”이나 “선배님”하고 부르다 보면, 어르신이나 선배 대접을 꼭 해야만 하고 받아야만 할 것 같잖아요.
그러다 보니 우리 문화에서는 세대가 함께 어울리는 모임이 말처럼 활성화되기 쉽지 않습니다. 세대가 함께 하는 모임이 활발해지려면, 윗세대가 먼저 ‘어르신’이나 ‘선배님’으로서의 자신을 내려놓아야 가능해질 수 있는데요. 그게 바로 젊게 사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외국 노인들은 젊은 사람에게 그냥 이름을 불러달라고 한다지요. 하긴 자기 친손주도 아닌데,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호칭으로 괜히 늙은 느낌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이름으로 불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나이 들수록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젊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무개님‘이나 ’아무개 회원님‘처럼 내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모임이나 활동을 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건 팁인데요. 나이 들어 부부 사이가 단지 가족 사이밖에 되지 않는다면, 가끔 서로를 아무개씨 하고 이름을 불러보세요. 느낌이 참 색다릅니다. 마치 연애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드실 거예요.
KBS 3라디오 출발 멋진 인생 방송작가 권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