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전생이 다람쥐인 사람들
가을을 참 산행하기 좋은 계절이지요. 그런데 산행 갈 때 차림이나 준비물은 저마다 다릅니다. 완벽하게 등산복 차림을 하고 배낭에 잔뜩 먹을 것들을 넣어 가시는 분들도 있고, 간단한 운동복 차림에 물병만 가지고 가는 분들도 있는데요. 50대 중년 이상 되신 분들 중에는 비닐이나 집게를 들고 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비닐이나 집게를 들고 산행을 한다면, 흔히 플로깅(plogging: 조깅을 하면서 동시에 쓰레기를 줍는 행동)처럼 산행하면서 등산로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우려는 건가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라 도토리를 주워가려는 분들입니다.
물론 도토리를 가루 내서 도토리묵을 만들어 먹으면 맛이 있지요. 예전에 먹을 게 귀하던 시절에는 도토리가 구황식품 역할도 했는데요. 요즘은 도토리가 다이어트 식품이나 별미식품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도토리는 어느 특정 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참나뭇과 참나무속에 속하는 나무들에 열리는 열매를 말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떡갈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가시나무에 열리는 열매들이 다 도토리라고 하는데요. 이런 나무들을 심어 소위 도토리 농사를 지어 도토리를 수확하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산에 가서 야생동물의 먹이인 도토리를 불법 채취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올 가을에도 어김없이, 국립공원뿐 아니라 동네에 있는 작은 산에도, 심지어 주민들이 자주 찾는 대학교 캠퍼스 동산에도, ‘도토리와 밤 채취 금지’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더군요. 운동을 위한 산행이나 걷기가 아니라, 인간 다람쥐가 돼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면서, 갖고 간 비닐봉지 터지도록 도토리와 밤을 주워가는 분들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재미 삼아, 또는 별미를 즐기기 위해 도토리를 잔뜩 주워다 도토리묵 한 번 쒀먹는 거겠지만, 야생동물한테 그 도토리들은 올겨울 과연 무사히 넘길 수 있느냐 없느냐, 생사가 달려 있는 소중한 식량인데요. 실제로 그런 인간 다람쥐 분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는, 몇 년 전에만 해도 쉽게 눈에 띄던 다람쥐나 청설모가 다 사라지고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임산물을 무단 채취하는 행위는, 엄연한 절도행위이자, 야생동물 생존에 필요한 양식을 없애서 생태계를 해치는 불법 행위지요. 야생동물들이 겨울을 나면서 먹어야 할 먹이를 그렇게 인간 다람쥐들이 싹쓸이해가면, 야생동물들은 제대로 겨울을 날 수 없고, 심한 경우 굶어 죽는 일도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먹이가 부족해진 동물들이 민가로 내려오면 농작물을 망치거나 전염병을 옮길 우려도 있습니다.
그래서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일부 지자체에선 현장 순찰과 단속뿐 아니라, 등산객들이 무심코 주운 야생 열매를 반납할 수 있도록 ‘야생 열매 수거함’을 만들어 동물들에게 돌려주고 있는데요. ‘나 하나쯤 주워가는 건데’, ‘고작 한 봉지밖에 줍지 않았는데’라는 생각이 생태계를 교란시킬 수 있다는 걸 알아야겠습니다.
'LNT'는 미국 국립공원 환경단체의 주도로 시작된 환경 운동인데요. ‘Leave No Trace’의 첫 글자를 딴 것으로 ‘흔적 남기지 않기’라는 뜻입니다. 'LNT'는 모든 야외 활동에서 사람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지침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전에 계획하고 준비하기
둘째, 지정 구역에서 산행 및 야영하기
셋째, 있는 그대로 보존하기
넷째, 배설물이나 쓰레기를 정해진 방법으로 처리하기
다섯째, 모닥불은 최소화하기
여섯째, 야생 동식물을 존중하기
일곱째, 타인을 배려하기입니다.
야생 열매를 무단 채취하는 분들에게 이 지침을 좀 알려주고 싶네요.
아무리 전생이 다람쥐였는지 도토리만 보면 주워오고 싶어도, 자연환경을 위해 떨어져 있는 도토리 한 알도 그 상태 그대로 두고 와야 합니다. 산에 갈 때는 내가 가지고 간 것을 버리지도 말고, 산에 있는 것을 가져오지도 말고, 내가 왔다 간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겠습니다.
KBS 3라디오 출발 멋진 인생 방송작가 권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