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10.05 17:22 | 수정 : 2022.10.05 17:25

<중년을 넘어선 그대에게 띄우는 안부편지>

38. 앞서 가는 차

예전에는 직장이든, 모임이든, 어느 곳에서든 내가 막내이던 시절이 있었는데요. 이제는 어느새 어느 곳에든 내가 제일 나이 많은 선배가 돼있을 때가 많습니다. 막내이던 시절에는 막내로서 심부름하는 게 싫어서, 얼른 선배가 돼서 선배 대접을 받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지금은 내 위에 선배가 있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요.

선배가 있으면 상대적으로 젊은 대접을 받게 돼서 좋고, 또 선배에게 이 나이에 어리광을 부릴 수 있어서 좋고, 특히 선배라는 울타리가 없으면 급변하는 시대가 몰고 오는 충격의 파고를 고스란히 직격탄으로 맞을 텐데, 선배를 통해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배울 수 있으니 좋고, 갈수록 선배가 있는 게 얼마나 좋은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선배는 인생길을 앞서 달리고 있는 ‘앞 차’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초행길을, 그것도 캄캄한 밤에 운전하고 갈 때는, 아무리 전조등을 상향 등으로 켜고 가도 바짝 긴장하고 가게 되지요.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맞게 가는 길인지 초조한 느낌도 들고, 또 혹시 어떤 돌발상황이라도 생길까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온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어둠 속 전방을 주시하면서 조심스럽게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럴 때 앞에 가는 차가 있으면 참 마음이 놓이고 든든하지요. 앞 차의 빨간 미등을 등대 삼아, 앞 차가 속도를 내면 나도 같이 속도를 내고, 앞 차가 속도를 줄이면 나도 좀 줄이고, 그렇게 앞 차와 속도를 맞춰 앞 차 꽁무니만 보고 졸졸 따라가면 되니까, 혼자 캄캄한 어둠 속을 헤치고 갈 때보다 피로도가 훨씬 덜합니다.

설령 앞서 가는 차가 아무리 오래된 차여도, 만약 밝은 대낮에 낯익은 길을 갈 때라면 ‘앞에 똥차가 걸리적거린다’고 폄하했겠지만, 캄캄한 미지의 길을 갈 때는 참 든든한 버팀목이 됩니다.

그래서 캄캄한 밤에 초행길을 달릴 때는, 저 멀리 앞에 가는 차의 미등이 보이면 참 반갑습니다. 얼른 속도를 내서 그 차 뒤에 따라붙게 되지요. 그리고 더 속도를 내서 추월할 수도 있지만, 안전하고 편안한 주행을 위해 속도는 거기까지만 내고 앞 차 뒤를 졸졸 따라갑니다.

인생길은 누구나에게 초행길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일은 생전 처음 하는 일들의 연속이지요. 생전 처음 마흔을 지나, 생전 처음 쉰을 넘어, 또 생전 처음 환갑을 앞에 두고.. 이렇게 계속해서 생전 처음 밟게 되는 미지의 길을 걸어가면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인생 선배들을 ‘앞 차’ 삼아 그 뒤를 따라갑니다. 그들의 모습이 좋건 안 좋건, 좋으면 좋은 대로, 안 좋으면 안 좋은 대로, 처음 가는 내 인생길의 등대 역할을 해주니까요.

더욱이 백세시대라는 사상 초유의 시대를 맞아, 예전의 장노년과는 다른 새로운 장노년으로 살아가는 인생 선배들을 보면, ‘아, 내가 첫 타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다’라는 안도마저 느끼게 됩니다. 인생 선배들이 먼저 새롭게 도전하고, 부딪히고, 좌절하고 극복해 나간 발자국을 보고 따라가면 되니까 얼마나 편하고 행운인지요. 

그래서 노년들은 이런 당당한 말을 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너 늙어봤냐? 나 젊어봤다’

실제 2,30년 전만 해도 정년퇴직하면 집에서 손주나 보고 여생을 마무리하는 줄만 알았지, 젊었을 때 못다 이룬 꿈을 이뤄나가면서 제2의 인생, 제3의 인생을 펼쳐나가는 시대가 될 줄 다들 몰랐잖아요.

지금 아무리 모르는 걸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인공지능에게 물어보는 시대라고 해도, 백세시대 인생길은 그야말로 인터넷에도 나와있지 않고 인공지능도 모르는, 생판 미지의 초행길입니다. 그러니 이 길을 나보다 한 발자국 앞서 헤쳐 나가고 있는 인생선배야말로 든든할 수밖에 없는 존재지요.

백세시대 인생길을 앞서 가는 ‘앞 차’들, 목적지까지 안전하고 편안하게 주행하길. 인생 후배가 뒤따라가며 열심히 응원합니다.

KBS 3라디오 출발 멋진 인생 방송작가 권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