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2.11.01 10:10 | 수정 : 2022.11.01 10:11

말 한마디가 가슴속에 오래 남을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느낌도 없는 말인데도 내게는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으면서 깊은 울림이 느껴지고 여운이 남고 내 심장을 관통해 버리는 그런 말이 있지요. 몇십 년이 지났는데도 내게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잘 지내~~~’

당신이 몇 년 만에 연락을 해오고 전화를 끊으면서 한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물론 가끔 보내는 소식 말미에는 당신은 늘 그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때마다 그 말이 귓속을 파고들어 머릿속을 지나고 가슴까지 흘러가는 동안 웃지 못했습니다. 가슴이 아려오고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할 말을 찾는 동안 전화는 끊어졌습니다. 당신은 다시, 당신의 강물에 들어가 흘러갔습니다. 난 당신이 남기고 간 말에 휘말려 혼란스러워하는 그동안 당신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 버렸습니다. 고작 ‘잘 지내~~’라는 말 한마디뿐인데 말입니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그냥 ‘끊어.’라는 말보다는 ‘잘 지내~~’라는 말이 확실히 느낌이 다릅니다. 전화를 걸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뒤에 보내는 ‘잘 지내’라는 마지막 인사에는 여운이 가득합니다. 이름 모를 가을 향기가 풍기는 것도 같고, 다른 어떤 것을 해주지 못하는 미안해하는 애잔함도 스며있는 것 같습니다.

사진제공=조규옥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잘 지내∼’ 전화를 끊고 가만히 되뇌어 보았습니다. 유성처럼 긴 여운을 남기고 사라져 가는 말을 다시 잡아들여 되뇌어 봅니다. 되뇌어 볼수록 짙은 향기가 풍겨 옵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염원 같은 것이 담겨 옵니다. 해주고 싶은 것은 많은데 해줄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돌아서는 뒷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당신을 만날 때면 늘 바람이 불거나 눈이 내렸습니다. 때론 비도 내렸지요. 그래서 우리들 앞에는 늘 산이 있던가, 강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먼 길을 돌다가 어느 날 횡단보도 앞 빨간 신호등 앞에 마주 보고 서 있기도 했지요. 그 빨간 신호등은 시간이 흘러도 흘러도 꺼지지 않는 작은 불빛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그는 언제나 ‘잘 지내!’라는 말을 하고 돌아섰습니다.

무라카미 류-의 「코인로커 베이비스」에서 나오는 D의 대사 중에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한자를 한번 봐, 사람의 사이라는 뜻이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人間)이란 한자를 잘 뜯어보면 사람과의 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어떤 간격이 존재한다는 뜻이겠지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국솥의 음식이 식지 않을 정도가 이상적이라 하고, 남자와 여자라는 사이는 찻잔 두 개가 마주 놓인 테이블만큼의 간격이 가장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그가 보내는 말 ‘잘 지내’는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바라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하기엔 너무 멀리에 있는 사람이기에 ‘잘 지내’라는 말로 다음을 기약하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가까이 있었다면 이마 지금처럼 상대방에게 ‘잘 지내’라는 말을 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요즘은 저도 ‘잘 지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이름 모를 향기가 풍기는 것도 같고 다른 어떤 것을 해주지 못하는 미안해하는 애잔함도 스며드는 느낌이 너무나 좋기 때문입니다. 이 말처럼 여운이 남는 말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안녕히...’ 란 말도 좋아는 합니다만 글 말미에 쓴다면 모를까 전화나 말로 사용하기엔 어딘가 간지럽습니다. 그렇다고 ‘안녕히 계십시오.’는 너무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거기다 너무 인사치레 적인 말 같아서 사용하기엔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쓰는 말이 ‘그럼 끊어’였습니다. 그에게도 늘 그랬습니다. 참 삭막한 말이지요. 그런 제게 ‘잘 지내’라는 말은 참으로 신선했습니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전화기 너머 보내오던 ‘잘 지내!’라던 말도 가슴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습니다. 곧 단풍 지고 겨울 오겠지요. 겨울이 오면 눈이 내리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들도 다 사라져 버릴 테지요. 그러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분명 당신에 대한 여운이 다 사라지기 전에, 바다에 닿기 전에 당신은 다시 안부를 전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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