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기회(機會)
새해를 맞아 어르신들이 젊은이들한테 이런 덕담을 많이 하시지요.
“새해에는 오는 기회를 잘 잡아서, 바라는 걸 잘 이루기 바란다”
그러면서 꼭 덧붙이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회는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기회가 찾아와도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없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아시기 때문에 이런 조언을 해주십니다.
이런 기회의 속성을 잘 표현한 게 바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기회의 신, ‘카이로스(kairos)’입니다. 이탈리아 토리노 박물관에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 리시포스가 조각한 ‘카이로스 상(像)’이 있는데요. 이 조각상은, 발가벗고 있고, 앞머리는 덥수룩하지만 뒤는 대머리이고, 어깨와 발뒤꿈치에는 날개가 있고, 저울과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습니다.
얼핏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웃음이 나오지만, 그 의미를 알면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로 정신이 퍼뜩 들게 됩니다. 카이로스 조각상 아래에는 이런 소개문구가 있습니다.
“내가 발가벗은 이유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기 위함이고, 앞머리가 많은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사람들이 금방 알지 못하게 하고, 내가 앞에 있을 때 쉽게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뒤로 지나가 버리면 다시는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어깨와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며, 저울을 들고 있는 이유는 기회가 있을 때 저울을 꺼내 정확히 판단하라는 의미이며,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는 이유는 칼같이 결단하라는 의미이다. 나의 이름은 기회(Opportunity)이다.”
그리스 신화의 기회의 신 ‘카이로스’는, 로마신화에서는 ‘오카시오(Occasio)’라는 기회의 여신으로 나오지요. 기회의 여신은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굴러가는 바퀴 위에 서 있는 모습이고요, 역시 ‘카이로스’와 마찬가지로 앞머리는 풍성하기 때문에 내 앞에 다가올 때는 확 잡아챌 수 있지만, 망설이는 순간 여신이 지나가버리고 나면, 뒷머리가 없어서 잡을 수가 없고, 만약 지나간 여신을 붙잡으려고 구차하게 따라간다면, 여신은 들고 있는 칼을 휘두른다고 합니다. 또 카이로스와 마찬가지로 발에는 날개가 달려 있어서 빠른 속도로 지나가 버립니다.
기회의 신 ‘카이로스’든, 기회의 여신 ‘오카시오’든, 한 번 지나면 붙잡을 수 없는 기회의 순간을 잘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기회는 젊은 시절에만 찾아오는 걸까?’ 의문이 듭니다.
흔히 ‘누구에게나 평생 동안 기회는 세 번 찾아온다’는 말을 하는데요. 이 말은 평균수명이 짧았을 때의 얘기고, 지금은 백세시대잖아요. 그러니 평균수명이 50세도 안되던 시절에 평생 동안 기회가 세 번 찾아왔다면, 백세시대에는 단순히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여섯 번은 넘게 찾아와야 할 텐데요. 특히 기회는 젊을 때뿐 아니라 나이 들어도 준비하는 분들한테는 많이 찾아올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실제 요즘 은퇴 후 제2의 인생에서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면서 이름을 떨치는 분들도 많잖아요.
그리고 엄밀히 말해, 기회는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는 거지요. 준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기회가 찾아와도 보이지 않고, 잡을 수 없다는 말은, 다르게 표현하면 기회는 결국 내가 준비하는 것이고, 내가 만든다는 얘깁니다. ‘복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궈가는 것’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라고나 할까요.
올해는 자녀나 후배들에게만
“새해에는 오는 기회를 잘 잡아서, 바라는 걸 잘 이루기 바란다”
라고 덕담하지 마시고, 스스로에게도
“새해에는 오는 기회를 잘 잡아서, 바라는 걸 잘 이루자”
라고 덕담을 해주세요. 그리고 그런 기회를 만들기 위해 매일 조금씩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KBS 3라디오 출발 멋진 인생 방송작가 권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