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3.01.11 17:38

<중년을 넘어선 그대에게 띄우는 안부편지>

50. 별일 없이 무탈하게

젊었을 때는 별일 없이 살아가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잘 모르지요. 청춘에게는 별일 없이 살아가는 건 그저 평범한 것에 불과하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하긴 청춘의 에너지는 ‘별일’을 만들지 않고서는 못 견딜 만큼 강력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런 에너지로 청춘들이 만들어가는 ‘별일’들로 인해, 이 세상이 그동안 발전하고 개혁돼 온 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이 드신 어르신들의 시선은 다릅니다. 일례로 어르신들한테 새해 소망을 여쭤보면 열 분이면 열 분 모두 그러십니다.      

“새해에도 별일 없이 무탈하면 좋겠다”.

물론 나이가 들면 청춘 시절보다 에너지가 떨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이 들어 별일이 있기보다 별일 없이 무탈한 쪽을 더 선호하는 건, 결코 에너지가 떨어져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보니까 큰 행복보다는 소소한 행복을 누리면서, 별일 없이 무탈하게 사는 게 진짜 최고라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는 ‘별일 없이 무탈한 것’을 그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폄하했던 분들도, 소위 산전수전 겪으면서 나이 들고 보면 ‘별일 없이 무탈한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 거지요.

특히 나이 들게 되면 ‘별일’이 갖는 의미를 잘 간파하게 됩니다. ‘별일’이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거든요. 게다가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기 마련인데요. 좋은 일 뒤에 맞닥뜨리게 되는 안 좋은 일은 몇 배나 더 충격이 크지요.

그래서 옛 어른들은 좋아도 별로 크게 좋아하지 않고, 나빠도 별로 낙심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감정에 휘둘려 살지 않기 위해서지요.

물론 감정은 우리의 삶을 참 아름답고 풍요롭게 해 줍니다. 단순한 팩트(fact, 사실)인 평범한 일상에 감정이 들어가면 눈에 띄는 포인트가 되고, 반짝반짝 아름다운 광채를 더하게 되니까요.

그러다 보니 요즘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진행자나 패널들, 심지어 방청객들조차도 방송에 대해 감정을 표현하는 리액션을 몹시 과장되게 합니다. 심지어 그래야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리액션이 과장된 프로그램은 자칫 본질을 흐리게 하기도 하고, 프로그램의 품격을 3류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웃음이 아무리 좋은 거라고 해도, 하루종일 큰 소리로 웃고 있을 수도 없거니와 그러면 정상이 아니지요. 모든 게 포인트면 그건 포인트가 아니잖아요. 반짝반짝 아름다운 광채도 어느 한 부분이 그렇게 광채가 나야 아름답지, 전체가 다 빛나면 형태도 가늠하기 어려울 거예요. 특히 감정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그냥 날뛰게 두면, 내가 그 감정 속에 매몰될 수 있습니다.

오세영 시인은 ‘원시(遠視)’라는 시에서 나이 듦의 지혜를 ‘멀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던데요. 멀리 떨어져 보게 되면 웬만한 ‘별일’은 ‘별일’로 보이지 않게 됩니다. 말하자면 멀리 떨어져서 차분하게 보게 되면,  어느덧 뜨거운 감정은 다스려지고, 냉철한 지혜가 다가오게 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겁니다. ‘별일’이나 ‘탈’이라는 것은, 내가 ‘별일’이나 ‘탈’이라고 생각해야 ‘별일’이고 ‘탈’이라는 거예요. 그 어떤 ‘별일’과 ‘탈’도 늘 ‘이만하길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면, 결코 ‘별일’도 아니고, ‘탈’도 되지 않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별일 없이 무탈하게 한 해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KBS 3라디오 출발 멋진 인생 방송작가 권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