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3.01.27 14:15 | 수정 : 2023.01.27 14:21

창가에 앉아 녹차를 마시다가 탁자 위 국화를 본다.
피거나 져야 할 때를 모르는 국화.
꽃 한 잎 찻잔에 담아 빙그르르 비스듬 흔든다.
지구.
지구 따라 도는 물결 두 모금 삼키며 서쪽 하늘 노을도 본다.
하늘.
그래, 나의 지구와 또 하늘이다.
감사하다!
지금 앉은 곳이 곧 세상의 중심이다.
내 지구 중심에 앉아
오늘도 하루 함께 지낸 내 지구에게 말을 건넨다.
 
지구.
내가 지구?
내가 지구니까 이렇게 감사드릴 수 있다는 것?
내 주위 것들을 느낄 수 있으니 감사드려야 한다는 것?
허!
그래 감사, 감사하다.
그 감사한 만큼 내 것을 내놓아야 함에 고개 한 번 더 숙이다.
내 것을 떳떳하게 내놓을 수 없는 다시 미안한 오늘지만.
내가 먼저, 너도 먼저,
중얼거리는 소리만 지구에 퍼진다.
나를 선뜻 먼저 내놓지 못하니 그저 고개 숙일 수밖에.
그래도, 지구에게 감사하다.
오늘을, 또 이 지금을, 지구가 내었으니, 그저 감사할 뿐.
 
그렇다, 다시, 고마운 하루가 이렇게 지난다.
오늘 같은 날은 한두 번 올까?
아니, 지나면 다시 오지 않는다, 참 쉬운 답이다.
차 한 모금 끝까지 마시다가,
국화 사이 노을을 물끄러미 끝까지 보려다가,
뭐 다른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본다.
다른 일이 생기길, 그래서 누군가 나타나길 기다린다.
찻잔을 다시 돌리다가
오늘이 담긴 빈 잔이로다 그래도 돌리다 보면
반드시 누가 움직이는지 내가 일어서든지 하리라.

기다린다.
잔속에 붙은 국화잎을 들여다보다가, 누가 소리하는지,
더욱 아는 척이라도 하며, 누가 손짓하는지,
오늘이 오늘인 것처럼, 그저 몇 초도 몇 년인 것처럼
찻잔에서 내 시간이 다 빠져나가는 걸 바라보며,
그냥 기다린다.
손이 팔이 아파도 내 것인가 하여
무슨 소리라도 듣고 만지다 기다리며 견디어 본다.
그랬다, 견디다 또 어제처럼 잠들고 싶은 것이었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오늘이 감사하다며.
 
행복이 지구 처음엔 있었을까?
파랑새도 사랑도 처음부터 있었을까?
없었던 것을 지금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없었던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고,
만지고 만지다 싫증 나면 그만 던져 버리고,
뒤돌아 어디에 던졌는지 마냥 찾아다니는 것이 아닐까?
엉뚱한 말들을 찻잔에 넣고
어떻게 버둥거리는지 어떤지 들여다본다.
미지근한 물도
또르르 엉뚱한 말 따라 잔 속에 굴려도 본다.
오늘이란 것이, 지금이란 것이,
하하거리며 잔에서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
들락거리다 딸그락 소리도 낸다.

내 웃음소리를 흉내 내는 듯.
그래, 이도 지구에 있다는 즐거운 소리, 맞다.
내 안에 있는 건
쓸모 있든 없든 깨끗이 비우라는 소리라니, 맞다.
 
숨을 멈춘다.
순간, 이때 하필이면 멈추는 지구다.
참 고맙게도, 또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멈추면 멈추는 지구.
고마운 지구다.
뭐 그렇다면, 지금 또


모든 것은 나로부터 다시 시작거린다.
지구에 있는 즐거움이 새로 몸으로 들어오는 시간인 것.
계속 숨을 멈추고 찻잔 속에 내 시간을 채운다.
국화잎도 잘 보이게 채운다.
언제까지, 얼마나 더 넣어야 할지 머뭇거린다.
허, 나는 무척이나 욕심꾸러기다.
지금 멈추어야 할까?
웃다가 멈추다가 몸을 낮게 낮게 찻잔 속으로 숙였다.
찻잔에 넣어둔 국화잎이 마를 때까지 움직거리지 않았다.
모두는 지구에서 사라질 것이라며 또 우긴다.
우길수록 웃음도 숨도 멈추길 바라며


은근슬쩍 찻잔 속을 노려보는데, 하하
또 멈추는 지구.
그래, 나보다 더 고마운 지구다.
 
지구야, 더 숨 멈출까?
음, 멈춰.
숨 멈추고도 웃어?
응, 그래.
어제처럼?
응, 마지막에만 웃어.
 
오늘도
순간마다 멈추다 웃는
멈춤과 기쁨을 알게 해 준 내 지구에 감사하다.
이렇듯 나는 홀로 국화차를 마실 때만
지구에 대한 감사의 묵념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묵념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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