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3.01.30 10:26

작년 3월 모친을 요양원에 모셨다. 필자는 처음엔 모친을 모시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요양원이라는 곳은 더 이상 집에서 돌보기 힘든 어르신을 모시는 곳이고 거기에 가신 어르신들이 대부분 거기서 생을 마치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곳에서 모친이 생을 마감한다고 생각하니 자식 된 도리로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주어진 현실 앞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치매도 있고 앞도 보시지 못하는 모친을 형님 혼자 돌볼 수 없음을 필자도 받아들여야 했다.

50대 초에 남편을 여의고 홀몸으로 삼남매를 키우느라 본인의 건강은 돌보지 않고 오직 자식들 뒷바라지에만 모든 정성을 쏟으셨다. 그 덕분으로 삼남매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인 가정을 꾸렸다.

자식들 모두 화목한 가정을 일구도록 해주고 난 뒤 이제 오롯이 본인의 삶을 즐겨야 하는 때에 이렇게 허무하게 치매라는 큰 병을 얻어 요양원에 가야만 한다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팠다.

이번 설날은 모친을 요양원에 모시고 맞이한 첫 설 명절이었다. 형님 댁에서 아침에 간단히 차례를 올리고 요양원에 계신 모친을 방문했다. 모친이 집에 계시지 않으니 제사 음식도 그렇게 정성 들여 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모친이 계시면 제사음식에 대해 정성을 쏟지 않으면 모친께서 꾸지람도 하셨을 텐데….

모친을 요양원에 모시면서 형님은 매주 모친을 찾아뵈었다. 물론 집에서 가까운 곳에 요양원이 있다 보니 자주 찾아뵐 수 있었다. 그러나 모친을 형님 혼자서 거의 10여 년을 모시고 살았기에 형님이 모친에게 필자보다 더 각별했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매주 찾아뵐 수 없는 여건이라 한 달에 한, 두 번 모친을 찾아뵈었다. 그렇게 찾아뵐 때마다 모친의 건강이 회복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현상 유지라도 했으면 했는데 점점 나빠짐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다.

작년 3월 모친을 요양원에 모시고 모친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젠 아들, 딸 이름은 완전히 잊어버리신 것 같았다. 엄마 둘째 아들 이름이 뭐예요? 물으면 전혀 대답을 못 하신다. 물론 둘째 아들 이름이 뭐라고 먼저 얘기하면 아 맞는다며 맞장구는 가끔 해주신다.

이번 설에 모친을 방문했을 때는 가족 모두 깜짝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치매라는 병이 기분에 따라 기억이 좀 더 살아나고 거의 기억을 못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 설 방문 시 모친이 보여준 증상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이번은 요양원 돌보미께서 모친 상태가 몇 주 전 방문 때보다 호전되었다고 했다. 특별히 몇 주 전 대비 모친을 더 잘 보살핀 것도 아닌데 어쨌거나 모친의 건강이 좀 더 나아졌다고 했다. 일말의 기대를 하고 모친에게 말을 걸었다.

모친은 20대부터 얼굴이 고우셔서 예쁘다는 얘길 많이 들었다. 그래서 모친이 동네에서 제일 미인이었다는 얘길 해드리면 정신이 온전하실 때도 얼굴에 기뻐하는 모습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엄마는 지난주보다 얼굴이 훨씬 좋아졌어요. 여전히 동네에서 엄마가 제일 예쁘세요.”라고 했다. 그러자 무표정한 모친의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번졌다. 이어서 엄마는 8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아직도 60대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자 모친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다. “야야 내 나이가 육십이 아니고 오십 아홉이다.”라 고 하셨다. 가족 모두 너무나 놀랐다. 물론 한편으론 무의식의 세계에서 모친이 무심코 던진 말이었지만 한편으로 모친의 유머로 들렸다. 모친의 오십 아홉이란 예길 듣고 가족 모두 박장대소했다. 치매로 본인의 이름은 물론 삼남매 자식들의 이름도 모르시는데 저런 말씀을 하실 수 있다는 게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때 모 서양학자가 주장한 말이 언뜻 생각났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이 말이 이번에 모친에게 그대로 적용되었다. 칭찬은 치매 걸린 모친도 웃게 만든다고. 비록 앞으로 언제까지 사실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상태로만 유지하고 고통 없이 하늘나라로 편안하게 가셨으면 하고 작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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