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3.02.24 15:41

눈이 내렸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눈인 듯 아닌 듯, 드문드문 눈이 내려 정말 눈인가 싶어 의심도 되었습니다.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눈 한 송이가 나풀 내 손등에 뛰어내렸다가 이내 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겨울다움의 대명사인 얼얼함도 없고 매서움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내리고 눈은 자포자기 심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이 자기들 생각에도 눈 구실을 제대로 못 할 거라는 걸 다 알 테니 말입니다.

그 무기력한 눈발 틈새로 어둡던 하늘도 점점 밝아지고 있었습니다. 물러 앉아있던 산들이 슬금슬금 다가앉았습니다. 빛의 감도가 점점 선명해지더니 오렌지빛 햇살이 부드럽게 털북숭이 목련꽃 꽃봉오리에 내려앉았습니다. 목련꽃 꽃봉오리가 살짝 부풀어 올랐습니다. 가을이나 겨울이 바람으로 찾아 든다면 봄과 여름은 빛으로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니 고개 하나만 넘으면 봄이 웅성거리고 있을 것 같아 봄맞이하러 가야겠다 싶었습니다.

둘레길로 나섰습니다. 봄맞이 걸음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겨울인데 싶어 깊은 겨울 때보다는 조금은 얇고 짧아진 다운 코트를 입었습니다. 둘레길 양지바른 곳, 쉼터 의자에 먼저 나온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쪼르르 앉아 햇빛 바라기하고 계십니다. 여린 오렌지빛을 닮은 햇살이라고는 하나 아직 겨울이라 바람은 찬데도 이젠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아니고 정겹습니다. 손톱을 세우고 할퀴는 겨울바람은 누그러졌다 해도 아직은 추운데 바라보는 눈길은 이미 봄입니다.

내 몸을 휘돌아 떠나가는 바람은 맵싸하고 톡 쏘는 기운이 서려 어김없이 봄을 실어 오는 바람입니다. 그런 바람이 좋아 나는 예전부터 2월의 둘레 길이나 들길을 걷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2월의 둘레길을 걷다가 습관적으로 양지바른 곳을 살펴봅니다. 혹시나 냉이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사진제공=조규옥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겨울을 지나오는 냉이는 초록색이 아닌 흙빛을 닮았습니다. 거기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휩쓸리지 않으려 언 땅바닥에 달라붙어 겨울을 납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도 않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두리번거리다 작은 냉이를 발견하는 날에는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데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봄이 오면 제일 먼저 떠 올리는 게 냉이나 쑥, 그리고 달래를 떠 올립니다. 하여 이들을 옛날부터 봄나물의 삼총사라고 불렀습니다. 그중에서도 냉이가 달래나 쑥보다는 추위에 더 강합니다. 쑥이나 달래와 달리 냉이는 늦가을에 싹이 터서 한겨울 한파 속에서도 자랍니다. 누구의 눈에 뜨일세라 조금씩 자기의 영역을 넓혀 나가며 자랍니다.

냉이는 긴 겨울 매서운 추위를 견디며 땅 밑에서 빨아올린 정기를 뿌리에 담아내 차곡차곡 독특한 향기를 만들어 축적해 갑니다. 그러다 땅속에 호미 끝을 들이밀고 냉이를 캐낼 때면 한 번에 그 향기를 터트려 버립니다. 산뜻하면서도 향긋한 냉이 향기가 코끝을 스치면 정신이 아득할 지경입니다. 그 어느 나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냉이 특유의 향기는 봄이 오는 길에 처음 만나는 봄의 향기입니다.

이런 냉이 향기가 많이 변했습니다. 요즘 내가 만나는 냉이는,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 향긋한 향기는 간 곳 없습니다. 마트에 냉이가 매대에 올라왔기에 봄을 만나겠다고 냉큼 사 왔습니다. 서울서 한참 떨어진 남쪽에서 올라왔겠지, 하면서 샀습니다. 그곳은 서울보다 당연히 봄이 먼저 오는 곳이니 냉이가 마트 매대에 올라오는 건 당연하다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냉이를 샀지만, 냉이 향기는 없었습니다. 냉이 아닌 것을 잘못 샀나 싶어 보고 또 봐도 냉이가 맞습니다. 그런데 향긋한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냉이를 다듬다 말고, 킁킁 냄새를 맡아봤지만, 냉이 향기는 나는 듯 마는 듯 희미했고 흙냄새가 더 강했습니다. 아마도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냉이였던 모양입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다 보니 한겨울 추위를 이기고자 깊게 뿌리를 박을 필요도 없었을 테고, 굳이 땅의 정기를 받아 만들어 낸 향긋한 향기를 뿌리에 저장할 필요도 없었나 봅니다.

그때의 실망스러웠던 마음이 눈길은 자꾸 양지쪽을 찾아 냉이를 찾습니다. 완벽하게 자기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냉이는 어디 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은밀하게 술렁거리던 마음에 실망만 가득 안고 돌아오는데, 아래쪽 길모퉁이에서 50대 아줌마 둘이 길 섶에 주저앉아 엎드려 있었습니다. 손길은 부지런히 땅에서 뭔가 뒤적거립니다. 저건 분명 냉이 캐는 사람들 모습입니다. 쑥이 나오기는 이르고, 분명 냉이 캐는 거다 싶었습니다.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냉이 캐는 아줌마들이란 확신에 목소리까지 커져 물었습니다.

“아줌마~~~! 뭐 하시는 거예요? 혹시 냉이 캐요”
“네, 냉이 캐요!”
“저 내려갈 테니 냉이 한 포기만 남겨 주세요.”
“아, 냉이 한 포기를 뭘 하려고요?”
“사진 한 장만 찍으려고요.”

냉이 캐던 아줌마 두 분은 이게 무슨 해괴한 부탁이냐고 허리까지 세우고 날 쳐다봅니다. 표정이 어리벙벙 그 자체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달려 내려가서 아줌마들 사이를 비집고 냉이 사진부터 찍었습니다. 그 기세에 아줌마들은 이 쪽, 저 쪽, 냉이 주변 마른 풀들을 낙엽들을 정리까지 해주며 사진 찍으라고 합니다. 아줌마들과 엎디어 봄을 찍었습니다. 새파란 냉이였습니다. 겨울 같아도 계절은 이미 봄으로 가고 있습니다. 흐르는 것을 따라 저도 세월 흐르는 대로 흘러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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