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3.03.19 16:37 | 수정 : 2023.03.19 16:40

광화문역 글자가 전철 창가로 슬며시 밀려 움직였다. 다시 살짝 닿는 어깨, 진한 회색 파카의 남자가 내 수첩 글씨를 힐끗 다시 쳐다본다. 그러다 천장, 아마 3초를 못 기다리고 수첩 글자를 따라오는 눈길이다. 또 3초를 넘기지 못하고 전철 천정을 본다. 남자는 천장과 내 수첩을 오가며 보는 일이 새 취미인가 보다. 고개는 약간, 눈은 더 약간 위로 향했다. 그랬다. 내가 볼 곳, 아니면 보았던 곳을 향했다.

살아있구나. 이렇게 살아 눈길이 위를 향한 남자를 느끼고 있구나. 바로 옆에 있는 남자를. 하, 그 옆에 있는 내가 있구나. 내 이야긴지 남자 이야긴지 그냥 쓰고 있구나. 입맛을 다신다. 또 글씨가 써진다. 위를 향하던 사내 눈이 내 글자들에 또 멈추었다. 나는 그냥 보라며, 내 글자를 보고 있는 남자에게 이런저런 말을 묻고 답하고, 또 묻다가 답하고 싶은 대로 그렇게 썼다.

당신도 살아 있군요. 아, 그래, 살아 있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살아있죠? 그냥 살아 있다고요? 왜 살아있죠? 떨고 있군요. 왜냐고 묻지 말라고요? 내 글자를 보고 있군요. 그래요, 괜찮아요. 천장이든 그 위든 쳐다보지 않아도 돼요. 뭐, 어때요, 당신이나 나나 살아 있는 건 마찬가진데요 뭐. 그대는 써지는 내 글자를 보고 있고, 나는 보라며 지금을 쓰고 있고, 그러니 뭐 어때요? 참, ‘왜’ 보다는 ‘어떻게’가 중요한가요? 아니, ‘무엇이’가 더 중요한가요?

뭐 내 글자를 더 보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하늘을 보는 일이 내 취미니, 당신과 비슷한 것이 있으니, 나를 보든 말든 괜찮아요. 숨을 쉬는 건, 그래도 살아있어야 하는 건, 무작정 글자를 적기 위함이라, 어찌 어떻게 왜를 따지며 물을 수 없지요. 어리석음이란 내 손과 눈과 입에서 먼저 생기는 것. 하늘을 보는 건요, 살아있다는 사실 외에 어떠한 것도 믿지 못해서 생긴 버릇이죠. 하늘 한 가지만이라도 나의 것이라고 믿고 싶어서죠.

남자는 다시 원래 제 버릇을 더 사랑하고 있다며 위를 향해 자랑하듯 일어났다. 아, 미안해요. 먼저 일어나서. 더 글자를 따라다니며 볼 수 없어 미안해요. 오래, 몇 시간이고 글자들을 따라다니고 싶지만, 그 글자들이 언제 멈출지 몰라서요. 그래서 먼저 일어나요. 그가 더 고마웠다. 조금만 더 글자들을 써 나아갔다면, 그에게 먼저 일어나겠다고 썼을 것이다. 나 먼저 살아야겠다고. 그대는 살든 말든 난 모르는 일이라고 쓰면서 말이다.

그랬다, 분명. 자신 모습을 서로 보이고 나면, 무엇인가 새것을 찾아야 한다. 그나 나나 새것을 찾아야 한다며, 서로 모르는 버릇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 내 새 버릇은 무엇이지? 아래의 아래를 한 번 더 봐? 하, 그 아래를 그 틈틈을 봐야지. 그래. 하하, 아래, 다음은? 위지 뭐. 위 다음의 위 한 번 더! 그러다 싫으면, 아래. 하하, 아래의 아래, 그러다가 또 위, 뭐, 또 위의 위. 하하하, 새 버릇 만드는 일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가 봐! 전철은 이제 막 마포역을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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