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3.04.03 17:03

태어나서 농사는 처음이었다. 하니 땅에 씨 뿌리면 저절로 자라나 열매를 맺는 줄 알았던 나였다. 당연히 퇴직 후에는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나 짓자 했다. 농사 단어 뒤에 ‘나’가 붙었다.‘나’가 붙으면 그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니 그만큼 쉽게 보았다는 얘기다. 퇴직 후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아파트 옥상 한편에 상자 텃밭으로 농사를 시작했다.

농사? 지금도 그 말을 떠올리면 혼자 실실 웃는다. 도시 농부란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시작했건 만 해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아파트 옥상에는 세 집이 농사를 짓고 있다. 601호 네 와 902호 그리고 나다. 601호 네는 농사의 고수다. 늘 휴일이면 친가로 내려가 부모님 농사를 돕고 있으니 당연하다.

601호 네는 상자 텃밭에, 이 것, 저 것 심기는 하지만 그냥 화초(?)를 기르는 거다. 심어 놓고 물을 주면서 즐기는 농사법이다. 902호 네는 심어 놓고 하늘에 맡기는 천수답 농사다. 텃밭에 물 주는 것은 거의 볼 수가 없다. 한 여름 땡볕에도 그 집 상자 텃밭은 그대로 두었다. 그 탓에 상자 텃밭이 쩍쩍 갈라지는 경우도 보았다. 그래도 902호 네 작물은 죽는 걸 보지 못했다. 자연의 신비로움이다. 어쨌든 비실거리며 살아남으니 말이다. 나? 나는 애면글면이다. 말 그대로 힘에 겨운 일을 이루려고 온갖 힘을 다한다. 그래도 실적은 별로다.

늘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면 우리네 상자 텃밭을 대충 돌아보고, 바로 601호 네 상자 텃밭을 꼼꼼히 둘러본다. 무얼 어떻게 기르시는지 살펴보기 위함인데 그렇게 꼼꼼히 살펴보고도 끝내는 내 맘대로 농사를 짓는다. 결국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다. 예를 들면 601호 네는 고추 모종을 5월 5일 어린이날이 지나야 심는다. 마음 급한 나는 4월 중순이 지나면 이미 고추 모종을 사다 심는다. 나중에 보면 우리 고추나 602호 네 고추나 다를 바 없다. 아니 어느 때는 602호네 고추가 더 잘 자란다. 그러면서도 늘 나의 눈팅 1호는 602호 네다.

오늘도 아파트 옥상에 올라 당연히 우리 집 상자 텃밭들을 먼저 둘러보곤, 바로 601호 네 상자 텃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농사 5년 차가 넘어가는 데도 아직도 601호 네 텃밭 눈팅 중인 탓이다. 요즘 그 집 상자 텃밭엔 여기저기 작은 들꽃들 세상이다. 나라면 벌써 뽑아 버렸을 잡초들이 상자 텃밭들을 점령하고 있다. 냉이 꽃도 보이고 하얀 꽃잎을 가진 봄맞이꽃도 보인다. 덕분에 올봄에도 들꽃들을 제대로 감상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중이다. 잎이 커피 열매 모양을 닮은 자그마한 잡초 무더기에서 별을 닮은 작고 하얀 꽃이 피었다.

민들레 노란 꽃이 제 세상인 냥 으쓱대며 춤까지 춤을 춘다. 그런데, '어라' 그 노란 민들레 꽃 옆에, 하얀 민들레꽃이 보인다. 노란 민들레 꽃에게 눈칫밥 먹으면 컸는지 잎도 작고 하얀 꽃마저 작다. 하얀 민들레 꽃은 정말 오랜만이다. 신기해서 한참을 그 앞에 서서 들여다보는데 그 옆에 작은 덤불 속에 연두 빛 하나 얼핏 스친다.

'어! 뭐지?' 싶어 덤불을 벗겨내니 꼬물꼬물 새 순이 올라오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쪽파다. 그러고 보니, 이 작은 덤불이 작년 초 겨울에 쪽파를 다듬고 버린 쪽파 뿌리 무더기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 연두 빛 새싹은 쪽파의 메마른 뿌리에서 나오는 새싹이었다. 놀랍게도 겨울바람 쌩쌩 부는 한겨울에 뿌리 채 뽑혀 허허벌판에 나앉았는데도 살아남았다. 나로서는 횡재였다.

분명 버림받은 것이니 내가 가져간들 도둑질은 아닐 터! 그대로 두면 죽을 건 뻔하고 소중하게 들어다가 잘 정돈된 우리 집 상자 텃밭에 심어 주었다. 버려졌던 쪽파는 내 상자 텃밭에서 뿌리를 내리고 봄이라고 새 순을 쑥쑥 올릴 것이다. 자연은 배신하는 법이 없으니까.

기분이 저절로 좋아진다. 오늘은 내 상자 텃밭에서 겨울을 이겨낸 쪽파를 뽑아내 다듬었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쪽파를 뽑아 다듬으면서, 뿌리 쪽을 잘라 낼 때 넉넉하게 자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쪽파 뿌리는 다시 상자 텃밭에 심을 것이다. 여름이 오기 전에 한 번쯤 더 수확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봄바람과 함께 두근대며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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