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 세상이 의롭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같은 나이의 사회 동료와 최근 자주 만났다. 만난 지 20년 가까이 되는 그는 이 세상이 ‘의’라는 이름으로 옷을 다 입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나 나나, 내가 상상하는 것은 이미 누구나 있었던 것이라며, 하나라도 먼저 행동으로 옮기자는 말도 나누었다.
과연, 의로운 세상은 올까 하는 꿈을 많은 사람이 꾸었으리라 본다. 멍청한 질문이지만, 몇 명쯤일까? 먼저, 그동안 지구에 살았던 사람부터 따져보자. 수백만 년 전의 구석기시대를 지나서 1만 년 전 신석기시대까지 500~1000억, 그 이후 산업혁명의 1750년까지 500~1000억, 그리고 그다음 살았던 사람이 200억 등등이라고 한다.
태고 때부터 성인으로 산 사람은 대략 1200~2200억이라는 억측도 가능. 현재 80억 명 정도가 살고 있으니, 나는 3~7% 확률의 사람이다. 아, 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아마도, 이러한 영광을 느끼기에, 사람들 눈에 안 드러나게, 의롭게 행동하려는 사람 수는 그래도 40억 명 이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만의 엉뚱함일까?
인간으로서 느끼는 영광을 다시 확인하는 지금, 참 행복하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행복감을 느끼리라 상상해 본다. 그렇다.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이 내 나이가 얼마냐 하는 것보다 우선한다. 기껏해야 신체의 나이, 지혜의 나이, 지식의 나이, 재산의 나이, 욕심 내려놓는 나이 등등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다른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에 그렇다. 결국, 행복의 나이는 서로 비슷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맞다. 나이와 상관없이 인간은 존중받아야 하는 것. 그런데, 누구나 존중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참 우습게도, 항상 앞 순번 정하는 일에 서로 앞장을 서곤 했다. 이도 어떨 땐 의로운 행동이라며 말이다.
의로운 행동은 상대를 인정하는 일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그런데 쉽지만은 않다. 어떤 이유에서든 상대 인정이란 내 희생이 먼저 따르기 때문. 승부의 세계에서 감히 내 패를 먼저 보이는 일일 것. 나는 이러저러하니 나와 함께 이러저러하지 않겠느냐는 의사 표현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당장 힘들지만, 마지막엔 마음 깊은 행복감을 느끼는 이가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이 의로운 행동이란 사람과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옳게 살고 싶기에, 이 다름의 차이를 반복해 기록하는 것이 어쩌면 태어난 사람 모두 바랬던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이렇듯 달라진 것을, 내가 행동했던 사실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보다 앞으로가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역사의 기록에 의해 문화로 혹은 문명으로 지금을 이루고 있다. 물론 누구나 지금 이 속에 있다.
어쩌면, 지금까지 존재하는 이론이 모두 그러하겠지만, 작금의 컴퓨터 문명을 이루는 이론도 그동안 살았던 사람의 무한대 시행착오를 줄이려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상상을 또 해본다. 내 쓸데없는 반복을 줄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 기대가 인간의 새로운 본능을 탄생시키려는 인간 진화의 하나일지 누가 알겠는가. 물론, 본능에 따른 움직임은 그동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본능이 자연스러우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지나치게 되는 경우, 매번 그 순간, 본능은 욕망으로 바뀌었다. 내가 그랬다. 그러니, 내 행동을 모두 기록해 두고 모두 볼 수 있다면, 그것을 느끼고 움직인다면, 누구에게든 드러낼 수 있다면, 그래서 행복하다면, 참 얼마나 좋을까.
결국, 내 것 하나 먼저 내어주려 노력하는 일이 의롭게 사는 길의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를 실천하기가 이렇게도 힘드니, 몸과 맘이라도 그 방향으로 틀고 있어야 할 일이다. 그 방향이 맞을까 어떨까 할 때마다 고개 숙여 가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