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3.08.25 17:53

상자 텃밭 고추나무에 앙증맞은 하얀 꽃들이 눈부시게 피었다. 낮이고 밤이고 시끌벅적 잔치 집 같다.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조차 보이지 않던 바람도, 아침저녁이면 슬쩍슬쩍 얼굴을 디밀고, 제법 시원하게 불어왔다. 여름 장마에 시들거렸던 상자텃밭 식구들이 너도 나도 발꿈치를 높이 들고 내미는 꽃들의 얼굴에도 제대로 화색이 돌았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가을을 맞이하는 기쁨에 자신감이 넘쳐 난다. 땅을 움켜쥔 뿌리는 단단하고, 줄기들의 곧은 자세는, 그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겠다는 결기마저 느껴진다. 여름을 이겨낸 튼튼한 줄기들과 윤기 자르르 흐르는 이파리들은 줄기 끝마다 매달려 있는 열매와 꽃들을 키워 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습기를 걷어 낸 햇살이 나날이 팽팽해지자, 상자 텃밭의 채소들은 서로에게 어깨를 내밀어, 너도 나도 여물어 가고 있었다.
 
낡은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다 상자 텃밭 앞에 놓고 앉았다. 서산에 지는 노을이 좋았고, 아직은 눈치 보며 소심하게 불어오는 이른 가을바람도 좋았다. 이젠 상자 텃밭에서도, 지는 노을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커다란 화분에 심어둔, 길게 뻗은 감나무 그림자가 점점 옅어져 가는 시간이었다.

사진제공=조규옥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계절이 바뀌고, 해가 저무는 시간은 말로 표현이 안 되는, 그만의 묘한 매력이 있었다. 물러나는 계절과 다가서는 계절만으로도 마음속에 무언가 뒤섞여 오묘한데 노을이 지는 저녁 시간이라니! 시간들은 그렇게 서로 섞여 들어 째깍대며 흘러가고 있었고 나는 여유롭고 한가로운 저녁 무렵이었다.

그런 저런 생각에 잠겨 무심히 바라본 고추나무 밑에 풀들이 납작 엎드려 바닥을 기고 있었다. 나의 매서운 눈길과 날카로운 손길을 피한 바랭이와 괭이밥이 산다. 아무리 뽑아내도 상자텃밭 어느 상자나 올망졸망한 얼굴이 많다. 잠시 한 눈 파는 사이에 쇠비름도 느닷없이 나타나 자리를 잡았다. 급하면 자가 수정을 해 자손을 퍼트리는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닭의장풀도 자랐다. 끈끈이대나물이 스리슬쩍 발을 디밀고.

지금 이 시기엔 나의 매서운 눈길도, 날카로운 손길도 무더져 있었다. 이 틈을 노려 온갖 들풀들이 이마를 맞대고 재잘대며 잔치판을 벌린다. 쇠비름은 땅 위로 넓게 자라며 통통한 잎을 자랑하고, 괭이밥은 귀여움을 가득 담고 노란 꽃들을 피워내고. 닭의장풀은 한 낮 푸른 꽃을 피우고 진다. 토마토 나무 가지 사이를 비집고 주홍빛 꽃을 피운 끈끈이대나물 앞에선 할 말을 잊기도 한다. 그러다 정신 차리고 “네가, 왜, 거기서 피었니?” 하며 물어보게 된다. 단조롭지도 싱겁지도 않고 하나하나 제 각각의 매력에 빠져들어 나는 가끔 오늘처럼 한참씩 들여다보곤 한다.

갑자기 매미 한 마리가 처연하게 울었다. 매미는 지금 여름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고 가을은 하루가 다르게 다가온다. 그 많던 암컷 매미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저 나무 뒤에서 슬그머니 엿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절망감에 매미 소리는 날카롭게 갈라져 있었다. 울다가, 울다가 어느 순간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빠듯하고 절망의 시간은 점점 앞으로 다가오니 왜 아니 그렇겠는가.

가지나무가 심어 진 상자 텃밭 쪽에서
“스르락 싸르락”
가을이 울었다. 턱 없이 짧아진 해와, 길어진 달그림자를 귀신같이 안 베짱이 울음소리다. 느닷없이 어는 날부터, 베짱이가 이 상자 텃밭 동네에 나타났다. 그동안 대여섯 마리를 잡아냈는데도 그 손길을 피해 숨어 살아 낸 모양이다. 엊그제부터 해가 질 무렵이면 살아있음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은지 베짱이가 울어 댄다.

이렇게 고추가 붉게 익어가나 땀방울은 아직도 온몸에서 솟아나는데 계절은 빠르게 가을로 넘어가고 있었다. 높아지는 푸른 하늘에는 뭉게구름 유유히 흘러가고 바람은 말갛게 불었다. 계절이란 게 묘해서 마냥 머물 것 같았던 여름도, 한 모퉁이 돌아서니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시간은 누구에겐 넘쳐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또 누구에겐 그만큼 짧아지기도 한다. 그 짧음에 매미는 처연하게 울었고, 베짱이는 해 지자 신나게 울었다. 상자텃밭에 사는 고추나무나 가지나무들도, 그 밑에 자리 잡고 눈치 보며 사는 객식구들도, 줄기 끝에 씨앗을 매달고, 마지막 여름의 마지막 뜨거운 햇살을 품에 안았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서로 기대어 토닥이고 끌어주며 마지막 결실을 맺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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