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4.01.09 14:08

올해도 새로운 일이 생기라며, 매년 초, 현관 입구에 매달던 달력, 내 버려둔 지 꽤 지난 그 첫 장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집을 나선 아침, 옷깃에 스미는 겨울바람이 제법 차다. 습관처럼 지나치는 전철 문래역 입구 가까이 긴 의자, 오늘도 고개 숙이고 앉은 사내를 다시 힐끗거리며 지나쳤다. 허름한 배 불룩 비닐 보따리를 안은 한 달 넘게 보아왔던 중년 사내였다. 자는 것은 아니었다. 우물거리는 입에 살짝 미소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면. 불쑥, 오늘은 사내 옆 다음 켠 긴 의자에 앉고 싶은 충동이 문득 일었다.

누가 보든 누가 함께 앉든, 그가 뭐라고 하지 않을 때까지 앉고 싶었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뭘 먹을 땐, 그렇게 살짝 웃음을 짓느냐고.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았다. 그대가 본 웃음은 처음 지어보는 거라 뭔지 모른다고. 전철 첫 계단을 내려가며 뒤를 살짝 돌아봤다. ​그는 여전히 웃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잠시 머뭇거리며 웃는 소리를 들었다. 웃으며 좀 이야기 좀 들어주었으며 하는 눈빛 소리였다. 갑자기 몸이 얼어붙은 듯 멈추었다. 코끝에 보이는 그의 머리 끝 하늘이 내 귀에 뭐라 뭐라 속삭이는 것이었다.

순간이동도움주식회사를 차리고 싶습니다. 회사 업종이 뭐가 될지 잘 모르지만, 나도 모르는 순간에 누구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싹 보내는 일입니다. 뭐 언젠간 누가 차리겠지만요, 이 세상에서 먼저 주주를 모집해 새 직장 영리법인을 세우려는 것이지요.

​처음이지만, 어떻게 운영하면 좋을지, 이런저런 전략을 세워두었습니다. 고객마다 어떤 순간을 원하는지 조건은 정할까, 오는 사람 다 받을까, 마음에 드는 사람만 받을까, 좋은 일만 한 사람만을 받을까, 그가 원하는 만큼 순간을 어떻게 만들까 등등. 수만 개 사연을 단 한꺼번에 느끼게 할까. 아니 아홉 번까지 나누어 보도록 할까. 뭐 뭘 별별 방법이 눈앞에 오락가락합니다.

약간 어려운 것이 있긴 하지요. 한 가지 원하는 일 마음껏 하게 하고, 멋진 순간 맞춰주기. 하, 좋지요. 그런데, 물론 ​스스로 선택하게 하겠지만, ​어떨 땐 옆에서 도와주어야 한답니다. ​그의 ‘마음잔’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 몇 백 년 여행을 시켜주는 것. 세상일 모두 처음엔 어렵지만, 그래도 몇 번 그 일을 하다 보면, 그가 나인지 내가 그인지 같아지니 멋진 일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하, 새로운 직업이고 ​고객은 꾸준할 테니 사업은 되겠지요. 뭐 그냥 이런 회사를 차려보려 하니, 이 세상 저 세상 가리지 않고 순간 세상 바꾸고 싶으면, 재산의 반을 투자하여 주기 바랍니다. 주주 여러분은 모두 같은 직원이고, ​매일 고객 한 명을 추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기 자신 추천도 가능한, 행복을 보장하는 평생 사업이오니, 부디 많이 투자해 주시기 바랍니다.

                                 - 졸시 '노숙자 김씨 투자요청서 사본' 전문


하늘이거나 그의 속삭임이거나, 꿈꾸듯 일순간에 들으며, 오래된 슬픔보다 커다란 기쁨이 일었다. 나는 지금 즐거운가? 아, ‘그래, 맞아!’ 하는 즐거움이었다. 한때, 그랬다. 가끔 내 삶의 아름다움 중 최고 정점은 어딜까 하는 엉뚱함이 머리를 들고 내 주변을 기웃거린 적이 있었다. 물론, 최고의 정점은 ‘지금이요’ 하고 그때마다 손이 높아지려 움찔거렸었다. 내가 원하는 것의 하나가 이루어지든, 아니 그 하나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고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 또한, 몸이 조금씩 아파가고 있든, 아프다가 그 아픔이 좀 나아지고 있든, 손이 위로 들어 올려지려 했던 것. 그랬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 지금이 가장 아름답다며 산이고 들이며 바라보려 손을 위로 꿈틀거렸던 적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혹시 그래도, 또 다른 아름다운 순간이 어디 있는 것은 아닐까, 그때가 어딜까, 하는 생각이 헛된 꿈일망정, 감히 고개를 내미는 것이었다. 해결되지 않는 것을 왼손 오른손에 쥐고 번갈아 보는 사람에겐, 다음 순간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겐, 그런 순간이 있으리라 믿고 싶을지 모른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순간에 내가 사라져 줬으면 하는 것.​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이 아름다운 최고 순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웃지 않을까 했었던 것.

참 헛된, 쓸데없는 상상이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 문래역 입구 긴 의자에 있는 그 사람처럼, 그래 그가 진짜 마지막 노숙자 김씨였다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산이고 들이고 바라보고 싶다며 웃으려 하지 않았을까? 누구나 산다는 것은 ‘아픈 채 사라지는 것’이 맞는다며, ​아직 덜 아플 때 세상이 영원히 환해졌으면 하며 말이다. 괜히, 문래역 앞을 지나치는 사람들을 보며 실소하는 그의 소리가 문득 다시 들렸다.

때마다
배가 고픈
내가 또 싫어진다

그런데
뭘 하라고
자꾸 웃음 나는고

그래라
웃어라 웃어
이번엔 좀 다르게

                                        - 졸시 '노숙자 김씨 失笑' 전문


원래, 노숙자 김씨가 세우고 싶었던 회사는 안락사주식회사였던 것 같다. 물론 ​그 회사에서 하는 일은 같겠지만, 순간이동도움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꾼 것은 결국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고 싶은, 아니, 이 세상에 남아있고 싶은, 허여멀건 욕망이 숨결 앞 마디마다 남아있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도 그처럼, 아니 그도 나처럼 이 세상에 참 미련이 많은가 보다. 저세상에서도 그럴까? 그것은 아니다. 저 세상은, 그나저나 상상의 세상이므로,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니까, 분명 아니다. 다만, 그저 왼쪽 혹은 오른쪽 세상인 말장난일 뿐인 것. 그냥 살아있어 느껴질 뿐이라는 것.

​아마도 그는 투자를 받지 못해 자본금 1원짜리 일인 법인이라도 차릴 것 같다. 그래도, 꼭 한 번은 세워보고 싶은 회사라며, 이런 회사가 마지막이 되길 바라며, 지금 바로 신청하고 싶다며, ‘허허허’ 하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속삭임으로 들리는 것이었다. 전철 입구에서 멈칫거리는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길 타고 들리는 웃음소리, 문래역 입구 계단마다 떼구루루 구르며 까르르거렸다.

긴 의자에 눕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는 그의 얼굴을 환하다. 나도 모르게 그가 보는 하늘 두둥실 구름을 보며 따라 웃었다. 맞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는, 아무리 배고파도, 아무리 더 늙어간다 해도, 죽는 순간까지 희망을 놓지 않으려, 그래서 웃어보려, 다르게 웃어보려, 그렇게 마음을 만져보려, 무엇인가 움직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문래역 계단을 가장 천천히 내려가며, 나도 더 천천히 웃는 것처럼. 그저 웃는 나를 누가 보든 말든 말이다. 그래,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은 누구나 살아있는 순간이 행복한 것이라며.


조선일보 조선닷컴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