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4.03.22 17:08 | 수정 : 2024.03.22 17:13

불교의 전파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 중 신라는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하였다.

즉, 고구려가 371년, 백제가 384년에 불교가 공인된데 비하여 신라는 528년 (법흥왕 15)에야 이차돈의 순교에 힘입어 불교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때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돌아가신지 1000년이 지난 후이며, 아쇼카 대왕이 인도를 통일한지 7~800년이 지난해 쯤이고 중국 梁나라에는 보리 달마가 찾아와 禪 불교를 펼칠 때이다.


<헌강왕 10년(817)에 제작된 이차돈 순교비, 6각석당(六角石幢) 형태 한 면에는 목을 치니 하얀 피가 치솟고 머리가 날아가는 순교장면을 새겼고 나머지 다섯 면에는 단정하게 칸을 그린후 글자를 새겼는데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어렵다. 경주국립박물관 소장>
<헌강왕 10년(817)에 제작된 이차돈 순교비, 6각석당(六角石幢) 형태 한 면에는 목을 치니 하얀 피가 치솟고 머리가 날아가는 순교장면을 새겼고 나머지 다섯 면에는 단정하게 칸을 그린후 글자를 새겼는데 마멸이 심하여 판독이 어렵다. 경주국립박물관 소장>

불탑의 시작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왔듯이 인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 후 사리를 정리하여 세운 최초의 근본 8탑을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 대왕이 허물어 8만 4000탑을 세우니 불탑은 세계로 퍼져 나갔는데 역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불탑이 들어오게 된다.

근본 8탑은 인도에도 남아있지 않고 몇 곳 흔적만 발굴되었으며 아쇼카 때 세운 고탑(古塔)으로는 산치 대탑이 대표적인데 자연석을 벽돌처럼 잘라 만든 모전탑 형식이라고 하며 이는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목탑의 형식을 갖추게 되니 우리나라 역시 초기 불탑은 목탑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아쇼카 시대의 고탑(古塔) 산치 대탑. 높이 16.5m, 직경 37m의 거대한 모전석탑이다.
<아쇼카 시대의 고탑(古塔) 산치 대탑. 높이 16.5m, 직경 37m의 거대한 모전석탑이다>

이렇게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탑의 초기 형태는 목탑이었을것이나 목재의 내구성 한계와 오랜 세월 전란과 풍우를 겪은 탓에 삼국시대 목탑은 남아있지 않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랜 목탑은 임진왜란 이후 사명대사가 다시 세운 법주사 팔상전이다.

속리산 법주사 5층목탑 팔상전 (국보)
<속리산 법주사 5층목탑 팔상전 (국보)>

황룡사지 9층목탑

그러나 경주에 가면 황룡사 터에 목탑 터가 발굴 정비되어 있어 9층목탑 실물은 볼 수 없지만 그 존재의 자리에 서서 그때를 추정해 볼 수는 있다.

기록과 전하는 바에 따르면 553년 (진흥왕 14) 경주에서 새 궁궐을 짓다 황룡이 나타나서 사찰로 고쳐짓기로 하고 566년(또는 569년)에 황룡사를 완성하였으며 643년(선덕왕 12)에는 9층목탑을 짓기 시작하여 644년(또는 645년)에 완성하고 자장율사가 가져온 사리를 안치 했다고 한다.

그후 여러차례 벼락을 맞는 등 피해를 입고 수리한 기록이 고려때까지 이어지나 1238년(고려고종 25) 몽골 군대가 황룡사를 불태우면서 9층목탑은 사라지게 된다.

경주 황룡사역사문화관 실내에 세워진 9층목탑 모형. 추측과 상상 작품이다
<경주 황룡사역사문화관 실내에 세워진 9층목탑 모형. 추측과 상상 작품이다>

9층목탑의 그림이나 사진이 없는데 어떻게 저런 모형을 만들었을까?

이밖에도 경주에는 모 대기업에서 세운 9층탑 모양의 실제 크기 건물이 있고, 이런저런 조형물이나 그림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무슨 근거에 연유한것일까?

다행인지 경주 남산 탑곡 바위에 새겨진 마애조상군 (보물)을 보면 신라시대 9층탑과 7층탑이 새겨져 있어 대략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으며, 나원리 5층석탑(국보)을 해체 보수할 때 내부에서 금동구층소탑이 3개 나왔는데 이 역시 당시 탑모양을 유추할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보물) 북면에 새겨진 조각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보물) 북면에 새겨진 조각>
북면 조각을 도면으로 그린 모습. 9층탑과 7층탑의 모양을 볼 수 있다
<북면 조각을 도면으로 그린 모습. 9층탑과 7층탑의 모양을 볼 수 있다>
경주 나원리 5층석탑(국보) 해체 보수중 발견된 9층소탑 3개. 높이 8.5cm
<경주 나원리 5층석탑(국보) 해체 보수중 발견된 9층소탑 3개. 높이 8.5cm>
황룡사 터의 9층목탑지. 중앙 심초석과 함께 모두 64개의 초석이 있었으나 현재는 62개만 있다. 1964년까지만해도 이곳은 민가들이 들어서 있었다
<황룡사 터의 9층목탑지. 중앙 심초석과 함께 모두 64개의 초석이 있었으나 현재는 62개만 있다. 1964년까지만해도 이곳은 민가들이 들어서 있었다>

이 황룡사 9층목탑은 중국 당나라에 유학간 자장율사가 말갈, 왜, 백제, 고구려 등의 침범을 걱정하자 신인(神人)이 9층탑을 세우라고 하였다는데서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호국사상의 발현으로 이해되며 시대별로 측정 단위가 달라져 정확한 크기를 제시하기는 쉽지 않지만 대략 상륜부 42척(약 15m), 합신부 183척(약 65m), 전체 225척(고려척 기준, 약 80m)의 대탑이었다고 한다.

황룡사터 9층목탑지 도굴사건

경주 황룡사지는 1962년 사적 제6호로 지정되었고 1964년 민가들을 철거하는 등 주변정리에 들어가자 가장 먼저 발생한 것은 목탑지 중앙의 심초석의 사리공을 도굴한 사건이었다.

목탑지 중앙의 심초석. 바닥돌처럼 보이는 것이 30여톤에 달하는 심초석이며 커다란 암석이 얹혀진 것은 심초석의 사리공을 덮은 것인데 1964년 민가가 철거되자마자 도굴범들은 이 커다란 암석을 들어올리고 심초석 윗면 사리공에 들어있는 사리장엄 공양품들을 훔쳐갔다
<목탑지 중앙의 심초석. 바닥돌처럼 보이는 것이 30여톤에 달하는 심초석이며 커다란 암석이 얹혀진 것은 심초석의 사리공을 덮은 것인데 1964년 민가가 철거되자마자 도굴범들은 이 커다란 암석을 들어올리고 심초석 윗면 사리공에 들어있는 사리장엄 공양품들을 훔쳐갔다>

이 도굴범들은 1966년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도굴미수사건으로 붙잡혀 수사과정에서 황룡사터 목탑지를 도굴한것이 드러나 장물들은 회수되었다.

또한 박정희 정권 때인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1978년 발굴조사를 통하여 872년(신라 경문왕 2) 중수 때 넣었던 찰주본기 명문이 적힌 금동사리함과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645년 목탑을 처음 세운 내력과 872년 목탑을 중수하게 된 과정들을 소상히 알게 되었으며 국립경주박물관과 황룡사역사문화관등에는 이 찰주본기의 원본과 복제본등을 전시하여 황룡사와 9층목탑에 대한 사실들을 잘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 땅에는 초기에 목탑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나 그 대표격인 황룡사 9층탑의 흔적만 남아있고 다른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그 이후 생겨난 석탑들은 다소 변형되거나 훼손되기는 하였으나 목탑에 비하여는 많은 탑들을 만나볼수 있으니 경주에서 만나는 신라석탑들을 하나하나 알아보기로 한다.

<계속>

*글/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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