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묵의 역사 답방] 경주 신라석탑 답사기 (5)

    입력 : 2024.05.07 16:31 | 수정 : 2024.05.07 16:36

    황복사지 삼층석탑 (皇福寺址 三層石塔) (국보)

    통일신라가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과 고선사지 삼층석탑 등 거탑(巨塔)을 세워 통일국가로서의 위엄을 갖추었으니 이 탑들은 통일신라 석탑의 시원(始元)양식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크기로 위용을 자랑하기는 충분하지만 석탑의 완성미가 부족하고 미적 감각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효소왕 때에 이르러 규모가 줄어들고 단순화되는 형상의 석탑이 나타나며 조금씩 보완되니 바로 황복사지 삼층석탑이다.

    이어 경덕왕 때에 불국사가 지어지면서 석가탑이 신라 석탑의 전형이자 완성으로 완벽하게 자리 잡게 되니 이 황복사지 석탑은 과도기 양식으로 분류되며 신라 석탑의 역사에서 갖는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황복사(皇福寺) 터(址)

    경주 황룡사지와 국립경주박물관 동남쪽의 너른 들판을 보문들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에는 신라 제26대 임금 진평왕릉과 함께 설총의 묘가 있으며 들판으로 내려서면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가 있고 그 건너편이 황복사지다.

    뒤쪽으로 낮으막한 야산인 낭산줄기를 따라 내려가면 능지탑과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로 이어지는데 보문들판 황복사지가 있는 곳 지역명이 구황동이니 황(皇)자 들어가는 절이 9개 있었다거나 구룡(九龍) 이야기와 연관된 지명으로 보인다.

    진평왕릉쪽은 제법 큰 도로변이지만 황복사지라고 믿어지는 삼층석탑이 있는 곳은 너른 들판 한가운데 농로를 따라 건너와서는 민가 몇 채가 있는 곳에 바짝 붙어 있는데 이곳이 황복사지라는 명확한 물증은 없다.

    다만 주변에서 절이름 '황복(皇福)' 혹은 '왕복(王福)'이라 쓰여진 기와조각이 발견되거나 석물 몇 개가 뒹그는 등 폐사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1930년대 일본인들에 의한 발굴조사때 밭둑에서 십이지산상 일부가 나오는 등 흥미로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고 한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황복사는 신라 진덕여왕 6년(652)에 의상대사가 출가한 사찰이며, 황복사에서 경문왕의 화장을 치뤘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지위가 높은 사찰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930년대 일본인에 의한 황룡사지 발굴조사 사진, 밭 아래로 소(牛)모양 십이지신 석판이 보이고 곰방대를 문 채 측량 막대를 쥔 조선인의 무표정한 모습이 대조적이다. 12지신상중 3개가 이때에 발굴 되었다고 하는데 황복사와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
    1930년대 일본인에 의한 황룡사지 발굴조사 사진, 밭 아래로 소(牛)모양 십이지신 석판이 보이고 곰방대를 문 채 측량 막대를 쥔 조선인의 무표정한 모습이 대조적이다. 12지신상중 3개가 이때에 발굴 되었다고 하는데 황복사와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 사진출처=문화재청

    황복사지 삼층석탑 (皇福寺址 三層石塔) (국보 제37호)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신문왕이 돌아가신 후 그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며,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이나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에 비해 작은 규모이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2중 기단에 3층 석탑으로 높이 7.3m이니 감은사지, 고선사지 석탑보다는 거의 절반 크기로 작아지며 완성도는 더 높아진것으로 평가된다. 탑 뒤로 보이는 너른 들판이 보문들이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2중 기단에 3층 석탑으로 높이 7.3m이니 감은사지, 고선사지 석탑보다는 거의 절반 크기로 작아지며 완성도는 더 높아진것으로 평가된다. 탑 뒤로 보이는 너른 들판이 보문들이다.

    하층기단의 탱주가 3개에서 2개로 줄었으며, 각 층 몸돌은 여러 개의 돌로 짜맞추는 대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 달라진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며 최초 거탑(巨塔)에 비하여 석재는 현격히 줄어들었고 각 부분의 완성도는 한결 높아지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과도기적 양식이다.

    지붕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1943년 석탑 해체수리때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사리함 뚜껑 안쪽에 적힌 명문을 보면 692년에 효소왕이 승하한 신문왕을 위하여 이 탑을 세웠으며, 그 효소왕도 승하하자 동생 성덕왕이 706년에 사리와 불상을 다시 넣어 아버지와 형의 명복을 빌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나왔다.

    황복사지 3층석탑은 2층 지붕돌에 사리공을 파고 사리함을 넣었으며 사리함 뚜껑을 씌우고 위에 얹히는 3층 몸돌을 조금 파내어 딱 맞춘 모습이다.
    황복사지 3층석탑은 2층 지붕돌에 사리공을 파고 사리함을 넣었으며 사리함 뚜껑을 씌우고 위에 얹히는 3층 몸돌을 조금 파내어 딱 맞춘 모습이다.

    국보 불상 2점이 출토되다.

    이렇게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나온 금불상 2점은 현재 국보 제79호, 제80호로 지정되어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되어있다. 그밖에도 각종 유리구슬, 팔찌 등 많은 유물들이 함께 나왔으며 특히 사리함 뚜껑 안쪽 금판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함으로써 이 탑이 언제 누가 왜 세운 것인지 명확해져 건립의도와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으니 국보급 석탑일 수 밖에 없어 보인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나온 금불상 2점. 왼쪽은 여래입상(국보80호), 오른쪽은 아미타좌상(국보 79호)으로 동(銅)에 금(金)을 입힌 금동제 불상이 아니라 유일한 순금불상이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나온 금불상 2점. 왼쪽은 여래입상(국보80호), 오른쪽은 아미타좌상(국보 79호)으로 동(銅)에 금(金)을 입힌 금동제 불상이 아니라 유일한 순금불상이다.
    신라 32대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을 위해 탑을 세웠고, 동생인 성덕왕이 형과 아버지를 위하여 불상과 사리를 탑에 봉안하여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새겨진 사리함 뚜껑 안쪽 금판. 이로써 석탑의 이력을 잘 알 수 있으니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신라 32대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을 위해 탑을 세웠고, 동생인 성덕왕이 형과 아버지를 위하여 불상과 사리를 탑에 봉안하여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새겨진 사리함 뚜껑 안쪽 금판. 이로써 석탑의 이력을 잘 알 수 있으니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렇게 통일신라의 석탑은 최초 감은사지 동.서 쌍탑과 고선사지 석탑의 거탑(巨塔)에서 크기가 조금씩 줄어들면서 완성미를 높이게 되는데 그 과도기 양식의 석탑이 황복사지 삼층석탑과 나원리 오층석탑이다.

    전체적인 석탑의 크기와 석재의 수량을 줄이면서 부분별 완성도와 미적 감각은 높아지는 과도기적 발전을 거쳐가는 과정이다.

    <계속>

    *글/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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