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4.07.01 13:53 | 수정 : 2024.07.02 10:47

장항리사지 서오층석탑(五層石塔) (국보)

통일신라 석탑의 모본(模本) 불국사 삼층석탑이 완성되었다.

사실 그 이후 신라의 석탑은 대부분 이 삼층석탑을 본떠 세우되 지역적 특성이나 경제적 여건에 따라 크기가 달라질 뿐 외형적 특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이중기단에 삼층석탑' 한 줄로 표현되는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이 되었다.

불국사 삼층석탑과 견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완성된 모본 석탑으로는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이 있는데 이는 원래 김천의 갈항사지에 세워져 있던 쌍탑으로 지금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세워져 있으니 경주 신라석탑 탐방기에서는 제외하기로 한다.

장항리사지

불국사에서 석굴암을 가려고 토함산에 올라가면 정상부쯤에서 좌회전을 해야하는데 이때 반대로 우회전하여 내려가면 토함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따라 개설된 한적한 도로가 있다.

그 물길은 감은사지 앞으로 흐르는 대종천과 합류하여 동해로 나가는데 합류지점 근처까지도 자연휴양림 하나 있을 뿐 깊은 산속이었는데 최근 합류지점 언저리에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건물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서 놀라게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한적한 길 중간쯤 도로 왼쪽 계곡을 건너 반대편 높직한 곳에 장항리 사지가 있는데 사명(寺名)을 알 수 없어 지명을 따서 '장항리사지'라 부르는 것이지만 (늘 주장하건대) '장항리 절터'라고 하면 얼마나 이해하기 쉽고 간단할까, 생각해본다.

<도로변에서 건너다 보이는 장항리사지. 비교적 온전한 서탑과 머릿돌만 겹쳐져 작아 보이는 동탑이 서있다. 지금은 물길을 건너가는 철다리도 놓였고 절터 주변도 축대와 올라가는 계단 등이 정리되어 있지만 불과 얼마전까지도 접근이 쉽지 않은 산골이었다.>
<도로변에서 건너다 보이는 장항리사지. 비교적 온전한 서탑과 머릿돌만 겹쳐져 작아 보이는 동탑이 서있다. 지금은 물길을 건너가는 철다리도 놓였고 절터 주변도 축대와 올라가는 계단 등이 정리되어 있지만 불과 얼마전까지도 접근이 쉽지 않은 산골이었다.>

석탑 수난사

이 땅의 많은 문화재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도굴, 불법반출 등 수난을 당했지만 장항리 절터 석탑도 예외가 아니어서 1923년 도굴범들이 한적한 산속 인적도 없고 하니 아예 폭약을 써서 폭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서 (대부분 석재를 밀어 넘어뜨리는 도굴과 달리) 5층 쌍탑과 석불상, 대좌 등은 폭파되어 버렸고 동탑은 계곡 아래로 굴러떨어져 흩어져 찾기도 힘들게 되었다.

이는 당시 총독부에도 보고 되었는데 계속 방치되다가 6년이 지난 1929년에서야 현지 조사가이루어졌고 1932년에 서탑은 5층 몸돌을 끼워서 현 상태로 복원하였으며 깨어진 석불은 당시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원 (현 경주국립박물관)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후 1966년에야 계곡으로 굴러떨어진 동탑의 잔해를 끌어올려 몸돌은 없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고 석불상은 박물관으로 보내진 후 현장에 남아있는 대좌는 지금 쌍탑 옆에 부서진 채 남아 있다.

<현재의 장항리사지 5층석탑 쌍탑의 모습. 왼쪽 서탑은 비교적 온전하게 복원되었으나 오른쪽 동탑은 1층 몸돌 위에 지붕돌 5개가 첩첩이 쌓인 상태로 세워졌다.>
<현재의 장항리사지 5층석탑 쌍탑의 모습. 왼쪽 서탑은 비교적 온전하게 복원되었으나 오른쪽 동탑은 1층 몸돌 위에 지붕돌 5개가 첩첩이 쌓인 상태로 세워졌다.>
<이중 온전한 서오층석탑은 국보 제236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경주에 남아있는 2개뿐인 5층석탑중 하나이다. 지붕돌 일부가 깨졌고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으나 주목하는 것은 1층 몸돌 4면에 새겨진 문비와 인왕상이다.>
<이중 온전한 서오층석탑은 국보 제236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경주에 남아있는 2개뿐인 5층석탑중 하나이다. 지붕돌 일부가 깨졌고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으나 주목하는 것은 1층 몸돌 4면에 새겨진 문비와 인왕상이다.>

신라 석탑에 등장하는 표면 장엄 조각들

장항리 오층석탑을 주목하는 이유는 1층 몸돌에 새겨진 문비(門扉)와 인왕상 조각이다. 탑석이 여러 곳 훼손된 가운데 커다란 1층 몸돌 네면에는 사실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조각들이 새겨졌는데 특히 문비 중앙에 문고리를 물고 있는 귀면상 표현은 놀랍기만 하다.

<장항리사지 오층탑 1층 몸돌 네 면에 새겨진 조각상. 문고리를 물고 있는 귀면상 2개는 각각 불교의 산스크리트어 처음과 나중인 '아'와 '흠'을 표현한것으로 인왕상의 입모습과 흡사하다.>
<장항리사지 오층탑 1층 몸돌 네 면에 새겨진 조각상. 문고리를 물고 있는 귀면상 2개는 각각 불교의 산스크리트어 처음과 나중인 '아'와 '흠'을 표현한것으로 인왕상의 입모습과 흡사하다.>

장항리 사지 석불상과 대좌

서탑과 동탑 옆에는 금당 터와 함께 깨어진 석재 대좌가 남아있는데 일제강점기때 도굴 현장을 조사하고 깨어진 불상은 경주박물관으로 옮긴 후 남아있는 잔해 수준으로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8각 석불대좌는 언듯 심하게 파손되어 보이지만 마름모꼴 형태의 여덟면마다 안상을 파고 그 안에 다양한 동작의 사자상을 새겼는데 잘 식별되지 않지만 그중 한면의 사자는 두 주먹을 쥐고 다소 익살스러운 표정이 드러나 웃음을 자아낸다.>
<8각 석불대좌는 언듯 심하게 파손되어 보이지만 마름모꼴 형태의 여덟면마다 안상을 파고 그 안에 다양한 동작의 사자상을 새겼는데 잘 식별되지 않지만 그중 한면의 사자는 두 주먹을 쥐고 다소 익살스러운 표정이 드러나 웃음을 자아낸다.>

깨어진 석조 장륙불상

대좌 위에 얹혔을 석불은 깨어진 채 박물관으로 이송되어 최근에 수집된 파편들을 모아 붙여 최대한 복원하고 대좌는 절터에 있으니 새로 만들어서 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하였었는데 얼마 전 다시 가보니 사라져 안보였다. 추가 복원이라고는 하는데 고증에 문제가 있어 치웠는지는 알 수 없다.

<한동안 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세워져 있던 장항리사지 석불상. 서 있는 입상(立像)이었다는 것이며 광배는 수습된 부분만 살렸고 절터에 남아있는 대좌부분은 전체를 새로 깎아서 조립했다. 높이는 약 4.8m로 장륙불에 맞춘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세워져 있던 장항리사지 석불상. 서 있는 입상(立像)이었다는 것이며 광배는 수습된 부분만 살렸고 절터에 남아있는 대좌부분은 전체를 새로 깎아서 조립했다. 높이는 약 4.8m로 장륙불에 맞춘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처음(?)으로 석탑의 표면에 장엄을 장식한 형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바 필자는 불국사 삼층석탑으로 신라석탑이 완성된 후 구성과 체계상으로는 더 보탤 것이 없기에 이제는 외부 장엄조각을 더하는 방법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나 학자들은 감은사지 석탑 등 거탑(巨塔)에서 불국사 삼층석탑으로 가는 중간기에 해당한다고 하니 신라 석탑의 발전 및 변천 과정을 조금 더 들여다봐야 하겠다.

<계속>

*글/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s://band.us/@4560dap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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