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원사지 동.서삼층석탑 (三層石塔) (보물)
통일신라 삼층석탑이 불국사 삼층석탑으로 완성되고
이어서 탑의 표면에 다양한 조각을 새기어 장엄(莊嚴)을 높이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중 손꼽히는 탑이 원원사지에 남은 동.서 삼층석탑(쌍탑)이다.
원원사지(遠願寺址) (사적)
원원사(遠願寺)는 행정구역상 경주시에 속하지만 남쪽 끝에 있어 울산과 가까운데 (부산, 울산 등지에서는 경주로 들어서는 초입이 된다.) 7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산속 깊은 모화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모화천을 따라 십여분 들어가면 봉서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어 평소 들리는 사람이 별로 없고 경주를 찾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곳이다.
전하기로는 신라 신인종(神印宗)의 개조(開祖) 명랑(明郎)이 세운 사천왕사(四天王寺)·금광사(金光寺)와 함께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문두루비법(文豆婁祕法 : 神印宗)의 중심 도량(道場)이었던 유서깊은 절이라고 하는데
이 가운데 명랑이 당에 건너가 밀교를 전수하고 돌아와 삼국통일후 당의 군대가 신라를 침공하였을때에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하여 당의 침략 격퇴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이란 외적에 의한 국난이 닥치면 불법으로 이를 물리치는 것인데 당나라 군사가 침공하자 문무왕이 명랑(明朗)에게 비방이 없는지 물었고 이에 명랑은 낭산(狼山)의 남쪽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을 열 것을 제의하였지만 시간이 급박하므로 채백(彩帛, 비단)으로 가건물을 짓고 5방(方)에 신상(神像)을 세운 뒤 유가명승(瑜伽明僧) 12인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쓰니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침몰하였다고 한다.
고려때까지도 이러한 문두루 비법을 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며 이를 행한 사찰을 문두루도량이라고 하는네 여기서 문두루는 범어 무드라(mudra)의 음사(音寫)로 신인(神印)으로 번역된다.
신라에서는 이러한 사찰로 사천왕사, 금광사와 원원사를 꼽는데 특히 원원사는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는 안혜(安惠)와 낭융(朗融)이 신라 왕실과 김유신 후손의 지원을 받아 원원사(遠源寺)를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호국사찰이었다.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 (보물)
원원사지는 조선말기까지 유지된듯하며 폐사가 되었지만 절 터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축대를 비롯하여 금당지(金堂址) 등의 건물터, 석등·부도 등 많은 석조유물이 남아 있다.
그중 이제 살펴보려하는 동.서 삼층석탑은 1931년에 복원된것인데 폐사 후 남겨진 석조물들이 많이 훼손되어 어렵사리 서있는 쌍탑의 모서리마다 처마마다 깨어져 보는이로 하여금 안타깝게 하는데 그나마 기단부와 1층 몸돌에 남겨진 조각상들이 온전하고 뛰어난 조형미를 갖추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아마도 신라 석탑이 불국사 삼층석탑으로 완성을 본 후에 석탑의 외부에 다양한 신상과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하는데 그중 빠른시기의 석탑으로 보인다.
원원사지 석탑이 눈길을 끄는 것은 상층 기단부 면석에 2개의 탱주를 세워 3분할(3칸)을 하면 석탑이 모두 네 면이니 12분할(12칸)이 되는데 여기에 12지신을 새긴 것으로 머리는 해당 띠별 짐승모습으로, 몸체는 인간인데 입고 있는 옷이 바람에 휘날리는 천의(天衣) 모습인 점이며, 기단부 위 1층 몸돌은 한 면에 하나씩, 네 면에 사천왕상을 하나씩 돋을새김으로 새겼는데 전체적으로 파손이 심한 상황이나 온전히 남아있는 조각상을 보니 그 솜씨의 공력이나 예술성이 돋보인다는 것이다.
통일신라 석탑이 거탑(巨塔)에서 크기를 줄여가며 완성미를 높이다가 불국사 삼층석탑에서 완성을 보았다면 이후 석탑 표면에 각종 조각 장식으로 장엄미를 높이게 되는데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이 그중 빠른 시기에 속한다고 한다.
그런데 12지신, 즉 열 두 띠는 불교 신앙과 무관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왜 불교 석탑에 12지신상을 새기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계속>
*글/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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