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다보탑(多寶塔) (국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후 자신감에 세운 거탑(巨塔)들이 과도기를 거쳐 불국사 삼층석탑으로 완성된 이후 탑의 표면에 다양한 조각을 새겨 장엄(莊嚴)을 높이는 경향이 나타나는 석탑들을 알아보았다.
그 이후 신라의 석탑은 그 외적인 모양에 다양한 변화를 모색한 이형(異形) 석탑들이 나타나는데 그 대표격은 불국사 다보탑(多寶塔)이다.
불국사 다보탑(多寶塔) (국보)
불국사 다보탑은 대웅전 앞마당에 석가탑과 함께 나란히 쌍탑으로 서 있다. 1금당 2탑인데 다보탑과 석가탑은 전혀 닮지 않았다. 석가탑은 명실공히 석탑의 완성형 모본(模本)이라고 한다면 다보탑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분리되거나 해석하기 힘든 특수형 탑, 소위 말하는 이형(異形) 석탑의 대표격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이 쌍탑으로 함께 서 있는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며 그래서 이 탑의 정식명칭은 다보여래상주증명탑(多寶如來常住證明塔)이다.
이 다보탑은 우리들의 탑에 대한 생각을 여지없이 무색하게 만드는 화려한 탑이다. 옆에 있는 석가탑은 3층 석탑이라고 하지만 다보탑은 몇 층 탑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국가유산청 설명도 층수를 헤아리기 어렵다고 씌어 있다. 그만큼 복잡하고 화려하며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통상 말하는 '2층 기단에 삼층석탑'이라는 신라 시대 석탑의 상식을 무참히 깨버리기 때문이다.
다보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되며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 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다보탑 수난기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말이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당하여,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으며, 현재 1마리의 돌사자만이 남아있다.
일부에서는 돌사자의 위치가 지금처럼 한 변의 중앙이 아니라 사각형의 각진 모서리 부분이었다는 주장도 있어 흥미로운데 또 다른 주장은 사자는 다보탑을 세울 때 함께 만든 것이 아니라 추후 따로 조각하여 위치시킨 것이라는 말도 있어 참고할 일이다.
그 후 우리 손으로 1972년과 지난 2009년에 대규모 수리, 보수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다보탑을 일컬어 참 화려하고 아름다운 탑이라고들 하면서 옆에 서있는 석가탑을 무뚝뚝하다고 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내공이 쌓이고 답사에 이력이 더해지면 석가탑(삼층석탑)이 더 아름답고 완벽해 보인다는 주장도 있으니 대웅전 앞 쌍탑 다보탑과 석가탑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참으로 소중하고 대단한 우리의 국보 석탑이다.
<계속>
*글/사진제공=김신묵 시니어조선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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