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4.20 10:51

“말이 쉽지…”하는 토를 달게 될 때가 있지만, 정말 말만큼 쉬운 것도 없는 듯하다. 생각 없이 뱉는 말이 그렇다. 생각했다 싶건만, 듣는 이의 마음을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하고 말했음을 나중에 아는 경우도 있다. 말만큼 어려운 것도 없음을 절감한다. 얼마 전 나의 말실수만 해도 그랬다. 한 워크숍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점심을 했을 때였다. 4명씩 둘러앉은 식탁에선 감자탕이 설설 끓고 있었다. 내가 그중 연장자 같기에 동석자들에게 탕을 퍼주는 서비스를 했다. 덩치가 있는 옆자리의 여자에겐 한 국자를 더했다.

“고맙습니다.” 내 딴에는 이에 화답한답시고 “평수 유지하시려면 많이 드셔야지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시 오후 교육이 계속된 가운데 강의 중에는 “상대방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삼가야한다”는 대목도 나왔다. 잠시 커피 타임에 옆자리에서 점심을 함께했던 여자가 내게 다가와 미소는 머금었으되 할 말을 했다. “강사가 상처 주는 말 하지 말라죠. 근데 아까 평수 유지란 말에 저, 상처 받았어요.” 체구가 작은 나로선 덩치가 부러워서 한 말이기도 했는데, 당사자는 그게 콤플렉스일 수 있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깜짝 놀라 사과부터 했다. 나중에라도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고기를 듬뿍 얹어준 내게 고마워만했을 줄로 착각하고 있었을 게다. “허리가 부러질 듯 한줌 밖에 안돼 보인다”는 말을 언젠가 한 지인으로부터 들었던 일이 떠올랐다. 살이 좀 올랐으면 하는 나로선 반갑지 않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는 거였다. 그만하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통통한 그녀의 질시 어린 눈초리 탓에 꿀꺽 삼켰던 기억이 새로웠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서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평수니, 한 줌이니 말이 나오는데 보이지 않는 것에선 오죽하랴.


축복도 상처도 말에서 오는 것

“밥 먹고도 꼭 달달한 게 땡기더라.” 최근 모임에서 한 친구가 말하자 다른 친구가 대뜸 ‘진단’을 내렸다. “너, 그거 탄수화물 중독이야.” 또 한 친구는 말했다. “나이 들어가며 자꾸 단 걸 찾게 되든데, 뭐. 혼자 밥 먹을 때 더 그런데, 몸도 맘도 쓸쓸해져 선가? 나만 그러니?” “나두 그래.” “나두.” ‘중독’이란 말이 준 냉기가 물러나고 화기가 감돌았다. 친구지간에도 왜 몇 시간 친구가 있고, 며칠 친구가 있다는 건지 알 것 같다. 한두 시간 함께 있기도 버겁거나, 며칠을 지새워도 좋거나 하는 건 결국 말에서 비롯되지 싶다.

언어폭력까지는 아니어도 행동이 따르지 않는 공허한 말, 배려심이라곤 없는 말이 친지들 간에 얼마나 흔한가. 헤어질 때의 멘트에 불과한 “언제 밥이나 먹지”, 안부를 궁금해 하는 “잘 지내니?”가 아니라 자신의 얘기에 급급한 운 떼기일 뿐인 “잘 지내지?”, 한 해 한 번조차 시간을 내주기 어려워하면서 혼자돼 외로운 친구에게 조언이 “재혼하지 않고 사는 게 좋겠다”,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전업주부가 바삐 사는 워킹맘에게 “죽어도 눈을 못 감겠구나”, 퇴직 후나 모임에 참가해야지 하니까 “누가 끼워준대?”

대학시절 얘기꽃이 만발한 아줌마들 모임에서 내내 입을 떼지 못하던 한 참석자가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그래, 나 대학 안 나왔다”며 울음을 터트리더라고 했다. 아마 얘기를 전하는 사람이 당시 미안했던 감정을 늦게나마 제3자인 내게라도 털어놓으려는 것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울기는, 어쩌라고?”로 말하는 품세가 우는 사람 앞에서 대놓고 못한 말을 이제라도 해서 시원하다는 듯했다. ‘어쩜 저럴까.’ 속으론 생각했지만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축복도 상처도 모두 말에서 오는 것, 나는 과연 어떤 말을 해왔는가 새삼 돌아보게만 됐다.


참말, 필요한 말, 친절한 말

보이는 얼굴의 상, 관상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말의 상, 즉 언상(言相)도 중요하다고 한다. 말은 마음의 표현이자, 죽을 사람도 살리고, 살 사람도 죽일 수 있는 게 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 속담에 “일언기출 사마난추(一言旣出 駟馬難追)”라고, “이미 내뱉은 한 마디 말은 네 마리가 끄는 마차로도 쫓아갈 수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디지털시대인 요즘엔 바이러스가 마차를 대신한다. 오프라인에서 네 마리가 끄는 마차 보다 빠른 속도로 말이 번지듯이 온라인에서는 SNS나 블로그 등을 통해 마치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입소문 마케팅을 ‘바이럴’ 마케팅이라고 부른다. 매스미디어를 통한 마케팅에 비해 비용이 저렴한데다, 기존의 채널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소비자에게도 다가갈 수 있다. 기업이 직접 나서는 대신 주변인들과 네티즌을 통해 확산되니 신뢰도 또한 높은 광고로 꼽힌다. 긍정적인 소문이 나면 막강한 효과를 발휘하지만, 부정적일 때의 위험부담도 있다. 그렇다고 소문 바이러스는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사전에 백신으로 위험을 예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이럴 마케팅에서 늘 긴장과 대비가 필요한 이유다.

일상의 말에서는 네이세비트의 ‘세 황금 문’이 내겐 꼭 필요할 것 같다. 말하기 전 지나가야한다는 세 개의 황금 문이다. 첫 번째 문은 참말인가, 두 번째는 필요한 말인가, 세 번째는 친절한 말인가. 입을 열기 전 매 순간마다 세 문을 다 지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도를 닦음에 다름 아닐 터이다. 그럼에도 문을 의식하노라면 조금은 나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라면, 디누아르 신부가 ‘침묵의 기술’에서 첫째로 일러주듯 “침묵보다 나은 할 말이 있을 때만 입을 연다”든가. 나이 들수록 말이 많아진다니 이 또한 결코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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