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6.20 15:15

이튿날 아침. 어제 공항에서 6시간을 달려와 묵은 요성호텔에서 아침 식사로 찐 달걀 두 개와 멀건 쌀죽 한 공기, 그리고 수박 몇 조각을 먹고 길을 나섰다. 오늘도 5시간을 더 가야 우리가 찾아가는 태항산맥 끝자락에 닿는 것이다. 또다시 몸이 비비 틀리도록 가야 하는 먼 길이지만 가이드는 이쯤은 중국에서는 단거리 중의 단거리니 길도 아니라 한다. 워낙 땅이 넓은 중국에서 살다 보니까 여행길의 시간의 개념이 우리와는 확연히 달렸다.

천계산(天界山) 노야정으로 오르는 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도롯가의 보리밭 사이로 부는 바람에 따라 물결치는 청보리밭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보리밭 군데군데 그들의 무덤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식으로 생각하자면 협소하기 짝이 없다. 웬지 좀 안쓰럽다. 나도 죽으면 묻히겠지만 저렇게는 묻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간다. 그건 그렇고 밀가루가 주식인 중국에서 웬 끝없는 보리밭인가 싶었는데 맥주의 원료로 쓰인다고 한다. 그 덕분에 청도 맥주가 특산품이 된 모양이다. 여행길에 나서면 늘 집 식구들에게 그곳의 맥주 서너 병을 사가는 버릇이 있는 나로서는 이번 여행에는 청도 맥주를 사가야 할 모양이다. 이제는 식구들도 당연히 사 가지고 오겠거니 하고 기다리다 반색을 하니 여행길에 나섰을 때 뭘 사가지 하는 고민은 이제 하지 않는다.

태어나 처음 본 붉은 찔레꽃.

갑자기 날카로운 경적이 나를 놀라게 한다. 버스 앞 차창을 내다보아도 그냥 한산한 우리네 시골 길이라 차 몇 대 지나갈 뿐이다. 이곳 사람들은 경적이 습관화 되어 있었다. 그러니 수도 없이 날카로운 경적을 내 차, 네 차 할 것 없이 울려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중앙선은 있으나 마나 차들은 도로 위가 운동장인지 저희 가고 싶은 대로 사방팔방(四方八方) 종횡무진으로 달린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스치는 풍경들이 다채롭다. 수심이 그다지 깊어 보이지 않는 넓은 강가에 강태공의 후예들이 즐비하게 늘어앉아 세월을 낚는가 하면 미루나무의 잎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뒤채이고 있다.

뒤채이는 미루나무 잎에 홀려 눈을 떼지 못하는데 붉은 꽃 무더기들이 군데군데 눈에 들어온다. 무슨 꽃일까? 잎이나 가지가 어디서 본 듯하다. 아예 얼굴을 차창에 붙이고 다시 다가오는 꽃 무더기를 살펴보다가 ‘아’하고 소리 없는 탄성을 질렀다. 찔레꽃이었다. 노래가 생각났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제목도 모르고 노래도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이면 아마 한두 소절쯤이면 다 부를 수 있는 노래다. 이 노래가 나올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난 붉게 피는 찔레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찔레꽃 하면 그저 흰색이나 연분홍만 봤었다. 그러니 노래에 나오는 붉게 피는 찔레꽃이란 가사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는데 붉게 피는 찔레꽃이 실제로 있었다. 아마 이 노래의 작사자 고향에는 붉게 피는 찔레꽃이 있었던 모양이다.

버스는 지나온 길보다 더 좁고 흙먼지가 뽀얗게 이는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유년 시절 신작로 길을 연상케 한다. 떠나올 때 맑았던 하늘은 어느새 흐려 있었다. 가이드 말로는 미세먼지 때문이란다. 갑자기 목이 따갑게 느껴진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날 보고 가이드가 슬며시 웃는다. 나도 멋쩍어 같이 마주 보고 웃었다.

버스는 어느덧 천계산 아래 도착해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천계산으로 올라가는 전동차로 바꾸어 탔다. 중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절벽은 바라보기도 겁이 난다. 그런 아찔한 곳을 전동차는 쉼 없이 달린다. 90도로 깎아지른 대협곡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가 싶으면 산촌이 나타났다. 유년 시절, 우리네 방 구들장으로 사용했던 납작하고 넓은 돌을 지붕에 얹은 소박한 집들이 스쳐 가고, 앵두처럼 다닥다닥 매달린 살구들이 노랗게 익어가는 길을 달려갔다. 드디어 천계산 중간 기착지인 청봉관에 도착했다.

노야정을 가기 위해 올라가는 케이블카.
노야정을 가기 위해 올라가는 케이블카.

여기서 다시 노야정으로 가기 위해서 산 정상으로 오르는 케이블카로 갈아탔다. 케이블카에 오르니 천계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천계산은 풍경이 아름다워 백리화랑으로도 불리 우며 계림과 산의 형태가 비슷하여 '북방의 계림' 이라 불리 우기도 한단다. 해발 1,660m의 천계산 노야정 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청봉관에서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서니 다시 888개의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35도쯤 기울어진 절벽에 만들어진 계단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올라가야 할 것인가, 멈추어야 할 것인가. 생각은 올라야 하는 것이 맞았지만 내 무릎 상태론 무리가 될 듯싶었다. 오늘뿐만이 아니고 내일도 모래도 산을 걸을 일이 많은데 여기서 멈추어야 했다. 욕심을 접기로 했다. 대신 1/3일쯤만 오르기로 했다. 천하제일정(天下第一丁) 이라는 도교(道敎) 사원인 노야정은 도교(道敎)의 창시자 노자(老子)가 여기서 수련했다는 곳이라는데 못 오르는 것은 서운한 일이었지만 어쩌겠는가.

888개의 계단을 오른 일행이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노야정에 올랐다가 내려오자 전동차를 타고 천계산 중턱 운봉화랑을 돌기로 했다. 운봉화랑은 갤러리식의 풍경대로서 해발 1570M 노야정 아래 산허리에 있다. 청봉관으로 부터 시작하여 한 바퀴 돌아 다시 청봉관이 끝이 되는 곳으로 전 길이가 8KM 로 마치 옥띠가 구름과 청봉사이에 홍암(紅岩)절벽 위에 둘러싼 듯하여 때로는 자주 운해에 덮여서 이름을 운봉화랑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따가운 햇살에 까맣게 그을린 사십 대의 여기사가 운전하는 전동차를 탔다. 천천히 달리겠지 했던 생각과는 달리 전동차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아찔하고 구불구불한 운봉화랑을 길을 마치 고속도로 달리듯 하였다.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이야 시원하기 그지없었지만, 절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달리는 여자 기사의 운전 솜씨에 혀를 내 둘렀다. 그 거친 운전 솜씨에 전동차가 모퉁이를 돌 때마다 아찔함에 간이 오그라들기도 했지만, 곧 그 아찔함을 즐기기 시작했다. 우리 가요가 쿵 짝 대며 앞서 가면 우리는 합창을 하며 뒤를 따라갔다. 불와태항, 릉공관협, 태항산장, 묘필생화, 봉황전치, 쌍룡희벽 등의 이름을 가진 곳에 내렸다가 타는 것을 반복하면서 천하절경에 넋을 놓았다. 때로는 겁에 질려 한 걸음 내 딛는 것도 어려워 벌벌 떨기도 했다가 멋진 풍경에 우리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운봉화랑을 돌며 자연의 웅장함에 고개가 저절로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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