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8.23 09:46

“제가 신선님을 모신 이래로 동해가 세 번이나 뽕나무 밭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난번에 봉래에 갔더니 바다가 이전의 반 정도로 얕아져 있었습니다. 다시 육지가 되려는 것일까요?” 중국 한나라 환제 때 마고라는 아가씨가 묻자 신선 왕원이 답한다. “동해는 다시 흙먼지를 일으킬 것이라고 성인들이 말씀하셨소.”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유래된 중국 ‘신선전(神仙傳)’의 한 대목이다. 세상이 몰라볼 정도로 바뀐 것을 비유할 때 곧잘 쓰이는 이 고사성어를 최근 세종시에 가서 실감했다. 서울에서 매일 출퇴근하다시피 오가는 이들도 많을 터인데, 이름부터 모든 게 달라진 세종시가 내겐 처음이었다. 선배가 세종시 외곽의 호젓한 골짜기에 사는 지인의 초청받았다며 동행을 청했을 때, 생면부지인 분을 방문하는 건데도 냉큼 따라나섰다. 그 댁 언저리는 내 어린 시절 추억이 서린 곳인지라 어떻게 변했는지 몹시 궁금해서였다.

마중 나온 그 분의 차를 타고 정부청사며 대통령기록관을 구경하고 달리노라니 그리운 지명들부터가 눈에 띄었다. 전동, 전의…. 도로표지판의 지명은 그대로였으나 시야에 들어오는 그 어디에서도 기억 속의 옛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고 그 누가 읊었던가. 사방은 현대식 빌딩과 아파트로 완전 딴 세상이 되어 있었다. 상전벽해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하기야 강산이 너 댓 번은 바뀔 세월을 건너뛰고 왔으니 당연했다.

그래도 그 옛날 추억은 아직 그대로인데, 스탠다드 흑백에서 시네마스코프 칼라로 바뀐 영화처럼 오히려 색을 입고 더욱 또렷해지고 있는데…. 이따금 기분이 가라앉을 때면 보물 상자에 고스란히 감춰둔 귀한 보물을 꺼내 찬찬히 들여다보듯 해서일까. 50년은 족히 흘렀건만 어제 일인 양 생생하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 ‘별’에서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목동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어 잠든 대목 같이 가슴에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 추억이다.


뽀얀 ‘국물’

예닐곱 살 무렵, 시골 외가댁에 내려가 지낼 때가 종종 있었다. 집을 떠날 때는 정말 싫었지만, 막상 가면 신바람이 났다. 놀 거리가 지천이었다. 외가댁은 서울에서 조치원역에 못 미쳐 완행열차만 서는 전동역에서 내려야 했다. 조약돌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개울을 건너고, 흙이 붉어 '붉은덕이'로 불리는 언덕도 넘어 한참을 들어가는 아주 시골이었다. 옛날엔 호랑이가 나타나기도 했다는 말에 가슴 졸이며 아버지 옆에 딱 붙어서 걸었다. 

사진=조선일보DB

그때만 해도 동네아이들은 내가 가면 “서울아이 왔다”며 우르르 몰려와서는 옷이랑 신발을 만져보곤 했다. 우리는 곧 친구가 되었다. 우리들 키만큼 자란 보리를 베러 어른들이 모두 집을 비울 때, 세상은 우리 차지였다. 외가댁의 널따란 배 과수원과, 담뱃잎을 널어 말리는 키 높은 건조장을 넘나들며 숨바꼭질을 했다. 시냇가에서 때 이른 물장난도 하고, 사방을 싸돌아다니며 실컷 놀았다. 천국이 따로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심드렁해지면 외가댁의 너른 타작마당에서 소꿉놀이를 했다. 풀을 뜯어다 콩콩 찧어서 사금파리 조각에 담아 주고받았다. “여보 밥 드세요”, “당신도 먹어.” 몇 번 하다보면 아쉬움이 생겼다. 진짜 먹을 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주인인 내가 이 방 저 방을 휘저은 끝에 드디어 먹을 걸 찾아냈다. 빛바랜 누런 양은 주전자에 들어 있는 뽀얀 ‘국물’이었다. 주전자 꼭지를 기울여 입을 대봤다. 세상에! 전혀 경험한 적이 없는 기막힌 그 맛에 우리의 소꿉놀이는 흥이 났고,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곤드레만드레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일까. 눈을 떠 보니, 사방은 캄캄한 밤이었다. 하늘엔 금방이라도 와르르 쏟아져 내릴 듯 별이 총총했다. 별들 저 너머로는 은하수란 것도 난생 처음 보았다. 그렇게 많은 별이며 은하수를 그 때 이후 나는 본 적이 없다. 어린 나이였지만 서울토박이에겐 너무도 황홀해서였을까, 아니면 숙취(?) 탓이었을까. 누운 채로 한참을 밤하늘만 올려다봤다. 갑자기 “꾸울 꿀”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보니 나는 타작마당 한 귀퉁이에 나지막하니 만든 돼지우리의 초가지붕 위에 곤드레만드레 널브러졌던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 다른 아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더러는 타작마당의 짚더미 위에, 더러는 펴놓은 멍석 위에 누워있었다. 달착지근하면서 싸하니 맛있는 그 국물에 그만 다들 초토화된 것이었다. 밭에서 돌아온 어른들은 사안을 파악했던지, 우리가 절로 깨어날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둔 모양이었다. 외사촌 언니 등에 업혀 집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나는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밤하늘만 바라보았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맥주 한 잔도 쉽지 않은 나건만, 어쩌다 토속음식점에 갈라치면 반 그릇이라도 동동주를 꼭 시켜본다. 그 때 그 맛이 그리워서다. 하지만 여직 그 맛을 찾지는 못했다. 어쩌면 끝내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맛이 아니라 외할머니의 정성이 빚어내고, 반세기 추억으로 발효된, 이 세상 단 하나의 맛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만 떠올리면 지금도 내 눈에서, 가슴에서, 입안에서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니 말이다.



조선일보 조선닷컴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