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파트 옥상에 올랐다. 봄을 맞은 텃밭 식구들이 해맑게 나를 반긴다. 작년에 나도 모르게 떨어진 상추 씨앗에서 싹이 나온 상추가 연초록빛 웃음으로 반기고, 싹이 나오지 않아 죽었나 싶어 손가락으로 땅을 헤집게 했던 더덕이 드디어 새순을 밀어 올려 덩굴을 뻗어 가며 나를 반긴다. 그 옆에 혹독한 겨울을 이겨 낸 대파가 드디어 꽃대를 올리고 딸기의 눈부신 하얀 꽃이 피어나 꿀벌을 유혹하고 있다.
며칠 전이었다. 아파트옥상 텃밭에 올라오면 큰 고무통에 옮겨 심은 알프스 오토메(신품종 화분용 사과)에게 제일 먼저 눈길이 갔다. 심상치 않다. 어쩐지 새싹의 색깔이 뿌옇게 바래져 보인다. 지중해 연안의 허브처럼 돋아 오른 싹들이 희끄무레 하다. 불길하다. 어젠 분명히 연초록빛이었는데. 황급히 다가가 들여다본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연초록빛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던 새싹의 끝이 메말라 있다. 손으로 만져보니 분명히 메말라 있다. 무슨 일이지? 분명 물은 충분히 주었는데….
순간 작년 생각이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그랬다. 작년에도 감나무를 이 고무통에 옮겨 심었다가 지금처럼 말라 죽어 버린 적이 있다. 그런데 또 알프스 오토메에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 감나무가 죽고 나서 그 고무통에 김장 무를 심었는데 아무 탈 없이 자라고 수확을 했기에 별일 없겠지 싶었다. 그런데 이게 또 무슨 일이람. 돋아난 새싹을 만져보고 또 만져 봐도 분명히 말라 죽어가고 있다. 곧 꽃이 피겠지 했던 꽃봉오리도 마찬가지다.
종로 5가로 나갔다. 속이야 상하지만 미련을 버리고 알프스 오토메를 사다 심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곳 저곳 기웃거리다 알프스 오토메 한 그루를 사면서 파는 아저씨께 들으라는 듯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작년에 사다 큰 화분에 심은 것이 싹이 나오다가 죽었는데 또 죽으면 어떻게 하지?'
“죽었다고요? 죽을 일 없는데…. 물 줬어요?” 가지를 치던 아저씨가 쳐다보지도 않고 묻는다.
“매일매일 잘 주었거든요.”
“매일 주었다고요? 뿌리가 썩었군.”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내가 한심한 듯 쳐다보지도 않고 중얼거린다.
그랬다. 사랑이 넘쳐서 물을 주다가 너무 주어서 뿌리가 썩은 모양이다. 김장 무가 잘 자란 것을 보면 고무통 속 흙은 이상이 없다는 뜻이니까. 나무를 팔던 아저씨가 한심하다는 듯하던 말이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물을 주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마르던 알프스 오토메에게 물을 주는 것 멈춘 지 삼 일째. 기적처럼 알프스 오토메 나무에서 오늘 아침 알프스 오토메 꽃 한 송이가 피었다. 농사(農事)란 농(農)자도 모르고 시작한 텃밭농사가 빚어낸 참극이다. 사랑도 깊으면 독이 되듯이 나 또한 그러했으니.
난 이제 아파트 옥상 텃밭 농사를 시작한 지 사 년 차다. 소위 말하는 우왕좌왕하는 도시 농부다. 내가 이 도시농부가 된 것은 간단하다. 퇴직하고 난 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를 키운다는 데 있고, 정성을 들여 무엇인가를 키운다는 것에 대한 성취감과 보람을 느끼는 정서적인 효과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시농부가 된 것은 노동이 아닌, 삼십 여년이 넘는 긴 직장생활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 버리는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즐거운 놀이다.
가끔씩 들르는 지인들에게 내가 기른 호박 한 개, 가지 한 개를 나누어 주면서 삭막했던 도시생활을 청산해 가는 과정이다. 별거 아닌 호박 한 개, 가지 한 개가 인간관계도 돈독해지고 삭막한 도시 생활에 따뜻한 온기로 채워 넣는다. 퇴직 후의 허탈한 마음이 아파트 옥상 텃밭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스스로 한가해지고 빛나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다 보면 내 후반기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도시농부가 되려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가야 할 것이다. 처음 가졌던 마음, 무엇이든 많이 심고, 빨리 심고, 최고로 잘 키우려고 했던 것이, 그 과도한 열정 때문에 감나무나 알프스 오토메의 죽음을 자초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며 진정한 도시농부가 될 날을 향해 나아가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