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서기가 윙하고 돌아가기 시작한다. 믹서기 안에 들어있던 아몬드 스물다섯 알이 순식간에 갈아져 위에서 아래로 곤두박질을 쉴 새 없이 하고 있다.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고소한 맛이 먼저 입안에 감돈다. 지금 갈고 있는 아몬드는 단순히 견과류가 좋다고 해서 먹는 것보다는 체중감량을 위한 것이다.
지난 세월은 살찐 사람들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면 요즘은 마른 사람들이 부러운 세상이다. 건강 문제도 그렇고 미관 상도 그렇고 해서 체중감량이 모든 사람의 목표가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사시사철 몸무게 줄이겠다고 너도나도 온갖 비결 하나씩은 가지고 산다. 나라고 다를 리 없다. 검정콩을 식초에 재웠다 먹으면 좋다고 해서 먹었다. 걸으면 살이 빠진다 해서 발바닥에 족저근막염이 생길 정도로 걷고 또 걸었다. 언젠가는 그린 커피빈, 우리말로 바꾸자면 볶지 않은 커피콩이 좋다고 해서 그것도 먹은 적이 있지만 다 허사였다.
그렇다고 내가 끈기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한번 시작 했다 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다. 그러니 체중감량의 여러 방법을 시작했다 하면 아무리 못해도 삼사 개월은 넘기지만 늘 실패를 하고 만다. 타고나길 살찌는 체질로 타고났다고 한의사는 물도 먹지 말라는 경고를 젊을 때 받아서 아무리 적게 먹어도 살은 쪘다. 간식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도 어느 순간 육십 킬로그램이 넘어가더니 칠십 킬로그램을 향해 줄달음을 친다.
한 숨을 푹푹 내쉬며 수많은 수단을 취해도 뾰족 한 수가 없다. 오십이 넘어 갱년기가 지나니 허리에 둥글고 굵은 태는 생기고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나 여기 있네 하며 얼굴을 내미는 뱃살은 미워도 내 배에 착 달라붙어 떠날 줄을 몰랐다. 체중감량을 하긴 해야겠는데 뾰족한 방법은 없고, 한숨만 쉬는 날들이었다. 그러다 눈에 번쩍 뜨이는 프로그램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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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월여 전 어느 늦은 밤, 평소와 마찬가지로 텔레비전 앞에 앉아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된 프로그램이다. 난 지금도 그 프로그램의 이름을 모른다. 그리고 어느 방송이었는지 기억도 없다. 다만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버터 위에 올려놓은 아몬드가 버터를 물처럼 녹여 버리는 장면이다. 물론 아몬드로 살을 뺐다는 사람들이 등장했으니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당연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그 프로그램을 끝까지 시청했다.
사실 그때까지 내가 아는 아몬드는 그저 몸에 좋다는 불포화 지방산이 들어 있는 씨앗이라는 정도였다. 그래서 아몬드는 생각나면 가끔 간식 정도로 사 먹는 정도다. 아몬드가 지방을 녹이는 성분이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今時初聞)이었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 정확히 그 성분 이름은 모르지만, 가르시아 성분으로 기억한다. 가르시아 성분은 탄수화물이 변해 지방으로 바뀌는 것을 막아 주고, 공액리놀렌산은 몸속에 있는 지방을 녹여 몸 밖으로 내 보낸다니 내게 이보다 더 좋은 먹거리는 없다.
다음 날로 마트에 달려가 아몬드를 샀다. 방송에서 말 한 대로 잘 흡수되게 아몬드 스물다섯 알을 씻어 여섯 시간을 불려서 믹서기에 갈았다. 고소한 맛이 먹기에도 좋았다. 그렇게 먹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믿기지 않는 일이 생겨났다.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이 십여일 후부터 몸무게에 변화가 왔다. 조금씩 빠지는가 싶더니 뱃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살이 빠진다. 요즘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날씬해졌다는 말에 입이 함박 만 하게 벌어진다. 식사량을 줄인 것도 없고, 매일 하는 걷기 운동을 더하는 일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그저 하던 대로 하는데 살은 빠졌다. 이대로 가면 이 삼 킬로그램만 더 빠지면 중단해야지 하고 있지만 아마도 계속 먹을 것이다. 아몬드 속에 있는 가르시아란 성분이 탄수화물이 몸속에서 지방으로 바뀌는 것을 막아 준다니 양을 줄여서 더는 살이 안 찌게 해야지 생각한다. 사람이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하며 감동한다.
지난 날 입던 옷이 작아져도 버리지 못해 쌓아 둔 옷들을 입어보는 것이 요즘의 내 취미생활이다. 정말 마음에 들었던 옷들을 차마 버리지 못했다. 언젠가는 입겠지 하는 미련이 버리지 않고 쌓아 둔 옷들이다. 십여 년 이상을 처박혀 있던 옷들이 올해는 빛을 발해도 될 것 같다. 빨간 반바지도 입어보고, 눈부시게 하얀 티셔츠도 입어보고…. 언듯 스쳐 가는 젊은 날의 모습에 기분이 날아갈 듯 좋다. 곧 무릎의 통증도 가시고 혈압도 정상을 찾아가리라.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꿈결 같다. 하루가 다르게 내려가는 체중계 바늘을 보면서 무병장수(無病長壽)의 꿈을 꾸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