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도둑'이 아닌 '늘근 도둑'이라는 제목은 나무늘보를 연상시켰다. 도둑이라는 단어가 전달하는 첫 이미지에서 느꼈던 것은 어떤 삶의 절박함 같은 것이었다. 제목의 이미지 전달은 예상대로였다. 새 책을 사면 책의 카탈로그에서 알아가는 느낌의 언어가 전달하는 이미지였다.
극의 시작은 캄캄한 어둠이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로 그곳은 일반 가정집이 아니다. 대통령 취임특사로 감옥에서 풀려난 늙은 도둑이 노년을 위하여 마지막 한탕을 계획한다. 잠입한 곳은 미술관이다. 세계적인 미술품들이 소장되어 있으나 작품의 가치를 모르는 두 늙은 도둑은 금고만을 노린다. 그들은 세상이 증오하는 끔찍한 강도나 엄청난 보석들을 훔쳐내는 계획적인 도둑들이 아니다. 치밀하지도 않으며 계획적이지도 않다. 어설픈 그들의 말투와 행동들이 오히려 웃음을 유발하며 연민을 불러내고 있었다.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욕심은 이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금고를 훔치기도 전에 배분율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은 경비견에게 붙잡혀 조사실로 끌려간다. 수사관의 치밀한 심문에 한심한 변명만을 늘어놓는 두 늙은 도둑의 어설픈 행동들은 노년을 걱정하는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으로 웃음과 함께 오히려 동정심을 불러온다.
수사관을 향하는 그들의 태도가 웃게 하지만 그것은 관객과 함께 안타까운 세상을 향하여 던지는 통렬한 웃음이다. 관객 모두가 공감하는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돌직구가 순간마다 공감 100%의 웃음으로 날아든다.
한바탕의 웃음은 단순한 웃음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닌 신명 나고 재미있는 마당극 한 편을 보는 기분이 되었다. 우리의 전통극인 마당극에는 관객과 배우가 함께 어울리는 장소로 무대가 따로 구분되지 않았다. 무대라는 관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 일본의 문화가 우리에게 유입되면서 극장이 생기고 신파극이 공연된 것이 그 시작이다. 처음 무대가 생기고 관객과 배우의 구별이 생기기 이전 우리 전통의 마당극에는 양반들을 향하는 서민들의 분노가 해학과 웃음으로 풍자되고 있었다.
연극 늘근도둑 이야기가 이어가는 무대는 연극의 3대 요소인 배우, 관객, 무대에서 관객을 완벽하게 무대 안으로 끌어들이는 마당극의 형식을 도입하고 있었다. 일정 부분이기는 하였으나 관객의 애드리브가 함께 해 공감하는 웃음의 무대가 됐다. 어느 순간 관객과 배우가 한마당의 장을 펼치면서 함께 웃어가는 공감의 시간이다. 관객과 함께 웃어가며 공감하는 신명 나는 놀이마당이 되기도 한다.
고전극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은 텍스트만이 아닌 텍스트가 설정되는 상황이다. 그 상황을 무대 위의 배우들은 그들의 기지로 관객에게 공감대를 유도하고 있었다. 연극을 통하여 통쾌한 복수를 하듯이 웃어가는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단면들이 막이 내려진 무대 위에서 계속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배우들의 언어와 행동으로 100분의 시간을 함께 웃어가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들의 서글픈 자화상이었다.
연극 늘근도둑 이야기에는 마당극에서 중시되었던 춤과 마임(Mime) 등의 표현성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도둑이라는 자신을 비하하는 이미지를 도입시켜 부조리한 현실을 향해 도전하지 못하는 어설픈 행동과 사회에 대한 비판과 자조 그리고 내면적 저항의 언어임을 깨달아 간다.
웃음은 단순한 웃음이 아니었다. 오래전 서민의 통렬한 저항의식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문화는 시대가 요구하는 언어와 사고로 변화되어 그 모습을 바꾸어 가는 것이라 하였다. 무대 위에서 온 힘을 다하여 바른 사회를 향하여 웃음과 표현을 창조하고 있는 그들에게 나도 소리 없는 마임(Mime)의 응원을 보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