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6.14 09:51

아침 6시나 되었을까. 아파트 위로 저공비행을 하는지 군 헬기 소리가 요란했다. 평소 이따금 몇 대 정도 날아가던 소리가 아니었다. 처음엔 짖어대던 동네 개들은 20여대는 넘을 헬기의 굉음이 연이어지자 기세에 눌렸는지 조용해 졌다. 휴일의 단잠을 결국 포기한 아들의 짜증도 내 말에 잠잠해 졌다. “오늘이 현충일 아니니. 현충원 추념식 때문인가 보다.” 집에서 서울 방향으로 7번째 전철역 동작에 내리면 닿는 국립현충원. 지난 5월 하순, 정말 오랜만에 그곳을 다녀왔다. 학생 때처럼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간 게 얼마 만인가.

한 반세기쯤은 지났으려나. 흑석동 큰아버지 댁에 놀러갔던 초등생 시절 이래 처음인 것 같다. 그런데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매스컴을 통해 봐왔고, 이따금 환승 차 내린 동작역에서 아카시 꽃내음을 맡을 때마다 그 진원지를 미뤄 알아 그곳을 바라봤기 때문이지 싶다. 사촌들과 큰댁 뒤꼍에서 산딸기를 따먹는 재미는 쏠쏠했다. 이어진 언덕이며 그 밑 수풀까지 헤집고 빨간 알맹이들을 찾다가 만난 그곳, 당시 국립묘지였다. 빈 틈 없이 담장을 두르지 않은 때였는지, 갑자기 수많은 비석들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어제 일인 양 생생하다.

실은 참배를 위해 현충원에 간 건 아니었다. 민족시인 김소월을 기리는 소월 백일장에 참가하기 위해서였으나, 글쓰기 보다는 문득 그곳에 대한 유년의 추억과 중고교 때 백일장의 향수에 끌려서였다. 동행한 지인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만큼 현충원이 오랜만인 경우는 없어 보였다. 이분들의 희생 위에 이렇듯 편안히 살고 있으면서….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백일장 글제들 가운데 하나인 ‘6월에 쓰는 편지’에 반성의 마음을 써볼까? 호국보훈의 달 6월을 코앞에 두고 현충원에서 열린 백일장이니, 참가자들 대부분이 비슷한 글을 쓸 것 같았다.


삶과 죽음을 함께한 친구

아예 나 자신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그간 음력 6월 생일을 지키자니 초복과 중복 딱 중간인지라 무덥기도 하거니와, 매년 날짜가 달라져 기억이 쉽지 않다는 말을 들어온 터였다. 내가 태어난 간지의 해가 다시 돌아온 올해부터 음력 날짜를 고스란히 양력 생일로 삼기로 했다. 마침 이달 6월 그 첫 생일을 맞는 참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새로이 다짐하려는 편지였다. 어차피 참가에 더 의미를 둔 백일장이라 원고는 일찌감치 제출한 후, 마음을 갖춰 참배할 작정이었다. 지인의 승용차 덕에 땡볕 속 너른 현충원을 둘러볼 걱정도 덜 수 있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우리는 수많은 묘비들 앞에서 묵념을 올리며 호국영령들을 추모했다. 연중 한번이라도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송구한 마음이 차올라 사진을 찍으면서도 얼굴을 펴기 어려웠다. 특별한 묘비가 눈에 띄었다. 다가가 보니 무려 52년 전인 1964년의 조선일보 기사 그대로를 비석에 전사해 놓은 것이었다. 글자가 뭉개지긴 했어도 ‘격전지에 피고 진 어느 우정’이 기사 제목으로 읽어졌다. 내용이며 사진도 명료하지 않았으나 ‘14년 전에 묻어 둔 전우, 돌 표지로 찾아가 발굴’이란 소제목으로 모든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벗 ‘友’자 들어간 단어를 꼽자면, 학교 친구 ‘학우’, 고향 친구 ‘향우’, 회사 친구 ‘사우’ 등등 많기도 하다. 하지만 ‘전우’만한 친구가 어디 있을까. 최근 빅데이터로 추출한 분석에선 한국인이 가장 못 믿는 사람 2위가 친구라는데, 삶과 죽음을 함께한 친구를 기어코 찾아내 현충원에서 영면케 한 전우애에 가슴이 뭉클했다. 발 길이 안 떨어져 한참을 머문 끝에 이동하다가 웬 부대 입구와 맞닥뜨렸다. 6.25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을 진행하는 유해발굴감식부대였다. 이제는 국가가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란 기치로 나섰다는 것이 다행스럽고 고맙다.


계속되는 편지쓰기

근처 벤치에 잠시 앉았는데, 가까운 정자에 차가 멈추더니 현충원 관리인인 듯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워계시는 건 안 됩니다. 영령들을 모신 곳에서 예의가 아니지요.” 백번 맞는 지적이다. 우거진 신록의 그늘 아래 누워서 휴식이나 즐기라고 만들어 놓은 곳은 아니니 말이다. 내 아들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젊디젊은 나이에 이곳에 묻혔다면, 앉아 쉬기조차 어디 마음이 편할 것인가. 대한민국에는 군인과 무관한 집이 거의 없고 보면, 내 가족 중 누군가를 대신해 여기 누운 이분들께 한껏 예의를 갖춰 마땅하다.

진정 편지는 이분들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내게 보내는 편지는 서둘러 원고지를 채워 냈지만, 이분들에겐 마음으로 천천히 쓰는 것이다. 비석을 비롯해 그 주위를 둘러싼 나무와 꽃, 잔디, 하늘과 구름을 편지지로 삼아 꽃향기며 바람과 새소리까지 담아 나가기 시작했다. 오후 6시 문 닫을 시간이 돼서 현충원은 나와야 했지만, 앞으로도 편지쓰기는 계속될 것 같다. 계절 따라, 날씨 따라, 무엇보다 내 마음 따라 쓸 이야기는 끊임없을 터이다. 대전의 현충원에는 ‘하늘나라 우체통’이 있다는데, 다 쓰면 한 통씩 갖다 넣을까.

집으로 오는 길, 동작대교 아래 강물이 저무는 햇살로 빛났다. 여느 때와 같은 저녁의 한강 풍광이었지만 오늘은 달리 느껴졌다. 수천수만의 다이아몬드 같은 물결 위로 ‘온 세상이 태어나는 것처럼 일출을 보고, 온 세상이 무너지듯 일몰을 봐라’는 앙드레 지드의 말도 반짝였다. 늘 그러듯이 나는 산 자들로 흥청대는 곳에서보다는 죽은 자들로 고요한 곳에서 더욱 삶을 깨닫게 되나 보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고 내일을 맞이할 수 있게 한 그 하나 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현충원을 향해 또 한줄 편지를 적었다. 바로 내게 쓰는 편지에 다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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