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나 되었을까. 아파트 위로 저공비행을 하는지 군 헬기 소리가 요란했다. 평소 이따금 몇 대 정도 날아가던 소리가 아니었다. 처음엔 짖어대던 동네 개들은 20여대는 넘을 헬기의 굉음이 연이어지자 기세에 눌렸는지 조용해 졌다. 휴일의 단잠을 결국 포기한 아들의 짜증도 내 말에 잠잠해 졌다. “오늘이 현충일 아니니. 현충원 추념식 때문인가 보다.” 집에서 서울 방향으로 7번째 전철역 동작에 내리면 닿는 국립현충원. 지난 5월 하순, 정말 오랜만에 그곳을 다녀왔다. 학생 때처럼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간 게 얼마 만인가.
한 반세기쯤은 지났으려나. 흑석동 큰아버지 댁에 놀러갔던 초등생 시절 이래 처음인 것 같다. 그런데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매스컴을 통해 봐왔고, 이따금 환승 차 내린 동작역에서 아카시 꽃내음을 맡을 때마다 그 진원지를 미뤄 알아 그곳을 바라봤기 때문이지 싶다. 사촌들과 큰댁 뒤꼍에서 산딸기를 따먹는 재미는 쏠쏠했다. 이어진 언덕이며 그 밑 수풀까지 헤집고 빨간 알맹이들을 찾다가 만난 그곳, 당시 국립묘지였다. 빈 틈 없이 담장을 두르지 않은 때였는지, 갑자기 수많은 비석들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어제 일인 양 생생하다.
실은 참배를 위해 현충원에 간 건 아니었다. 민족시인 김소월을 기리는 소월 백일장에 참가하기 위해서였으나, 글쓰기 보다는 문득 그곳에 대한 유년의 추억과 중고교 때 백일장의 향수에 끌려서였다. 동행한 지인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만큼 현충원이 오랜만인 경우는 없어 보였다. 이분들의 희생 위에 이렇듯 편안히 살고 있으면서….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백일장 글제들 가운데 하나인 ‘6월에 쓰는 편지’에 반성의 마음을 써볼까? 호국보훈의 달 6월을 코앞에 두고 현충원에서 열린 백일장이니, 참가자들 대부분이 비슷한 글을 쓸 것 같았다.
삶과 죽음을 함께한 친구
아예 나 자신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그간 음력 6월 생일을 지키자니 초복과 중복 딱 중간인지라 무덥기도 하거니와, 매년 날짜가 달라져 기억이 쉽지 않다는 말을 들어온 터였다. 내가 태어난 간지의 해가 다시 돌아온 올해부터 음력 날짜를 고스란히 양력 생일로 삼기로 했다. 마침 이달 6월 그 첫 생일을 맞는 참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새로이 다짐하려는 편지였다. 어차피 참가에 더 의미를 둔 백일장이라 원고는 일찌감치 제출한 후, 마음을 갖춰 참배할 작정이었다. 지인의 승용차 덕에 땡볕 속 너른 현충원을 둘러볼 걱정도 덜 수 있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우리는 수많은 묘비들 앞에서 묵념을 올리며 호국영령들을 추모했다. 연중 한번이라도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송구한 마음이 차올라 사진을 찍으면서도 얼굴을 펴기 어려웠다. 특별한 묘비가 눈에 띄었다. 다가가 보니 무려 52년 전인 1964년의 조선일보 기사 그대로를 비석에 전사해 놓은 것이었다. 글자가 뭉개지긴 했어도 ‘격전지에 피고 진 어느 우정’이 기사 제목으로 읽어졌다. 내용이며 사진도 명료하지 않았으나 ‘14년 전에 묻어 둔 전우, 돌 표지로 찾아가 발굴’이란 소제목으로 모든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