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7.08 15:44

비 내리는 지리산 둘레길 15코스

녹음이 우거진 지리산에 가고 싶다. 지리산에 가기 위해 신청을 해 놓고 장마 기간이라 염려되어 계속 날씨 예보를 살핀다. 경기 쪽엔 집중호우다. 아마도 우중도보가 될 것이다.

저녁, 배낭을 꾸린다. 오늘은 순서가 다르다. 우중도보에 대비해서 준비물을 챙긴다. 여벌 옷 한 벌, 양말, 운동화도 하나씩 더 준비한다. 수시로 도보 카페 공지를 보며 비옷, 우산, 스패츠, 수건 그리고 간식, 물 등 필요한 물건을 챙긴다. 내일 하동 쪽에는 새벽부터 아침까지 호우주의보, 우리가 내려가 길을 걸을 즈음에는 약간의 비가 올 거라 예상된다.

새벽에 일어나 집을 나선다. 길은 뿌연 안개에 휩싸여 있다. 비 오는 아침 풍경은 싱그럽다. 버스는 반포에서 출발했다. 죽전을 거쳐 천안 휴게소를 지나 남쪽으로 달리고 있다. 세 시간을 달려 하동 땅을 지난다. 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 중간에 하얀 구름이 짙게 걸쳐있다.

여태껏 햇빛이 나는 날씨였는데 이곳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모두 장비를 갖추고 빗속을 걸을 것이다. 얼마나 더 가야 할까? 섬진강이 흙탕물이 되어 흐른다. 시작점이 가까워져 오자 모두 걸을 준비를 한다. 버스에 두고 내릴 물건과 가져가야 할 물건을 나누고 스패츠를 하고 비옷, 스틱 등을 챙긴다. 오늘 도보는 지리산 둘레길 15코스 원부춘 마을부터 가탄 마을까지이다.

30여명이 걷기 시작. 산 중턱에 걸쳐있는 운무가 마음을 심쿵하게 한다. 오늘은 우산대신 머리에 어우동 모자를 썼다. 두 손은 스틱 잡는 데 사용하고 간간이 사진도 찍는다. 계곡 옆을 걷는다. 계곡 흐르는 물소리와 빗소리를 들으며 한 걸음씩 내딛는다.

오케스트라의 교향곡 연주 같다. 빗소리만 조용히 들릴 땐 피아니시모,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면 메조 포르테, 요동치며 흐르는 계곡물소리가 나면 포르테, 빗소리와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합해지면 포르테시모다. 걸으며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가며 자연의 소리와 함께하니 걷는 걸음이 가볍다.

몇 년 전 폭설이 내려 30cm 넘게 눈이 덮여있던 강원도 산길이 생각난다. 아마도 그땐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이었을 거다. 아름다운 지리산 속에 있음에 또 한 번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산위에서 간단하게 김밥을 먹었다. 누군가 막걸리를 가져와 한 잔씩 돌린다. 땀인지 빗물인지 모르게 땀을 흘렸다. 막걸리가 몸속에 들어오자 따스한 기운이 몸을 감싼다.

올라간 만큼 길을 내려온다. 내려오는 길은 쉽지 않다. 누군가가 땀 흘리며 놓았을 돌계단을 밟으며 계속 내려온다. 힘들다. 어느 시점에 오자 걷기 싫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에 있는 중촌마을을 지나고 정금마을을 지난다.

이 15코스 원부촌마을에서 가탄마을 까지의 길이 지리산 둘레길 중 가장 어려운 길이란다. 3.9km 남겨놓은 지점에서 포기할까 했지만 그럴 수는 없다. 같이 걷던 길벗이 힘내라고 홍삼차를 건넨다.

굽이 굽이 나지막한 산모퉁이를 몇 개 넘어서니 멀리 마을이 보인다. 대비마을을 지나 드디어 아름다운 가탄마을에 도착. 이렇게 아름다운 산골 마을이 있다니 감탄이 멈추질 않는다. 커다란 원을 그리며 있는 짙은 녹음의 산 중턱에 운무가 아름답다. 이쪽을 봐도 저쪽을 봐도 경치는 아름답다 못해 신비롭다. 신선과 선녀란 단어가 떠오른다. 누군가가 말한다. "여기에 있는 당신들이 오늘 신선이고 선녀입니다"라고.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 머무를 수 있음에 감사의 기도가 나도 모르게 나온다. 비 오는 날의 우중도보는 얼마나 멋들어진 일인가. 햇빛이 쨍쨍 비추는 7월의 날씨였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날씨가 오늘 도보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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