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망령을 내려와 만 명의 신선이 살았다는 만선산으로 향했다. 산서성(山西省)과 인접해 있는 하남성 태항산대협곡(太行山大峽谷)의 기슭에 있는 만선산은 곽량촌(郭亮村)과 남평(南坪)으로 나뉜다. 만선산(万仙山) 입구에서 30분 이동하면 아찔한 절벽 위에 13명이 5년간 공사하여 1977년 완성했다는 1,200m의 동굴도로 절벽장랑(絶壁長廊)이 나오고, 그 위에는 소박한 산골 마을로 중국의 무협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곽량촌(郭亮村)에 도착한다고 한다.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했다. 아찔한 절벽 위에 만들어 놓은 길을 버스가 달려갈 때 처음엔 무서워 눈까지 감았는데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고 있었다. 만선산은 중국의 대표적인 산림지역 답 게 나무들로 울창했다. 스쳐 가는 길가에는 자연 봉분으로 꿀을 채취하고 있는 벌통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늘 가짜 꿀로 시끄러운 우리나라의 실정을 아는지라 버스가 이곳에 선다면 값이야 얼마든 두말없이 꿀 한 통을 살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차창밖에는 산촌의 마을들이 옛날의 모습들은 없어지고 숙박업소나 음식점으로 바뀌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처지에서는 좀 더 좋은 환경으로 바뀌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관광객으로서는 너무나 아쉬운 일이었다.
만선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꼭 통과해야 하는 비나리길이 있다. 깎아지른 절벽에 만들어 놓은 길은 전쟁 시에 피난길이었다는데 그 말이 자꾸 발음하다 보니 비나리 길이란 명칭이 붙었다는 이야기다. 일설(一說)에는 일본군이 쳐들어왔을 때 피난했던 길이라고도 했고, 또 일설(一說)에는 3대에 걸쳐 80년간 순전히 두 손만을 가지고 팠다는 설도 전해지는데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만들어졌던 피난길은 피난길이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터널을 사람 손만으로 뚫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년이 걸렸을 텐데 피난을 가기 위해 팠다는 것은 조금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분 초를 다투는 전쟁에서, 적군이 그 몇 년 동안 가만히 지켜봤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정설(定說)이든 사람의 힘이 자연을 이겼으니 위대할 수밖에 없다.
이 비나리길 입구는 철문으로 잠겨 있었다. 터널이 좁은 탓에 반대쪽 입구에 차가 들어오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원주민들이 통행세를 받기 위해 설치했다고 한다. 작은 초소에서 나온 남자가 문을 열어 주어 비나리 길에 들어섰다. 드문드문 걸어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눈에 뜨인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비나리길 중간쯤에서 마주 오는 원주민 자동차와 마주쳤다. 어쩌지? 어쩌지? 하고 있는데 다행히 길 한쪽에 비킬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통과를 할 수 있었다. 터널을 빠져나오니 사진을 찍으라는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르르 내린 일행들이 포토존에 모여 사진을 찍고 다시 차에 올라타고 만선산으로 향했다.
만선산으로 오르는 길들은 오늘도 미세먼지로 가득했다. 그런 미세먼지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날이 흐렸는지 미세먼지 탓인지 구분도 잘 못 하여 가이드에게 묻곤 했다. 몸에 나쁜 미세먼지라지만 나름 미세먼지 덕분에 부드러운 곡선이 겹쳐지는 만선산의 몽환적(夢幻的)인 분위기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걸어 올라가야 한다고 한다. 골짜기를 따라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는데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숨은 차오르는데 바람 한 번 불지 않는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길은 땀을 줄줄 흘리게 하고 숨을 헐떡이게 했다. 오르는 계단은 왜 그리 또 많은지 수 억 년에 걸쳐 만들어졌다는 붉은 암석인 홍암(弘巖)도 내 눈에 그저 돌로 보이게 만들었다. 걷고 또 걷고 며칠째 걷는 길은 급기야 무릎에 통증이 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하였지만 이미 오르기 시작 한 길을 중도에서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협곡의 비경(秘境) 속을 끙끙거리면서 걸어올라 만선산 위에 올라서니 웅장한 산세가 나를 압도 한다. 멀리 우리가 지나온 터널 적벽장량이 보인다. 건기라 비가 오지 않아 폭포를 제대로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버스를 다시 타고 곽량촌으로 향했다. 곽량촌은 중국 무협영화의 대부분이 촬영된 곳으로 아찔한 절벽 위에 위치한 산촌 마을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곽량촌은 일요일이라 중국 사람들과 외국 관광객이 함께 몰려들어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 틈에 끼어 마을 길을 가다가 구공탄을 발견했다. 말 그대로 연탄은 연탄인데 구멍이 아홉 개인 앙증맞은 크기의 구공탄이다. 남자 어른의 손바닥이라면 한 손에 쥘 수 있을 만큼 작았다. 그 연탄을 카메라로 찍고 있는데 친구가 그 집에서 굽고 있는 호떡같이 생긴 빵을 하나 사서 한 조각씩 나누어 준다.
입에 넣어 봤지만,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밍밍한 밀가루 빵일 뿐이다. 꼭 옛날 시루떡을 찔 때 시루와 솥 이음 부분에 둘러 붙였던 밀가루 맛이다. 그 빵을 우물거리며 곽량촌 마을 샛길로 접어들었다. 그들의 속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길도 없는 길을 걷노라니 '이렇게 해 놓고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적어도 정리정돈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려다보이는 지붕에는 쓰레기가 악취를 풍기고 사람들이 복작대는 길가에서 닭을 잡고, 무협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마을이라고 해서 기대를 잔뜩 안고 들어섰는데 실망만 안고 돌아서야 했다. 가끔 국내 여행지에 가보면 너무도 인공적으로 조성된 관광지에 환멸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처럼 너무 자연스러운 그들의 생활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니 이 오락가락하는 내 마음을 어찌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