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7.19 09:59

팔천협.

팔천협을 가는 날이다. 원래는 구련산을 가야했지만 건기라 구련산을 포기하고 개장한지 한 달이 되었다는 팔천협을 가기로 했다. 전날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만선산이나 곽량촌이 아니기를 바랬다.

시간이 촉박 했는데 평소에는 차들만 지나다녔다는 이차선 길에는 노점상과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장날이란다. 일 년에 두 번, 골짜기 각 부락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오는 장날이란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오늘은 장날이자 각 부락 대표자들이 일 년에 두 번 모여 열리는 회의가 있는 날이란다. 그래서 장사꾼들이 몰려들고 장사꾼이 몰리니 부락마다 몰려나온 것이라고 한다.

내려다보니 우리네 시골 오일장과 비슷하다. 제일 많은 게 말린 과일 종류이다. 뜻밖이다. 우리네 오일 시장엔 말린 묵나물이 많은데 이들은 나물 먹는 일이 별로 없는 모양이다. 그 다음 많은 것이 옷이다. 어른 아이 옷 할 것 없이 한 집 걸러 옷 장사들이다. 우리나라 길에서 파는 옷들이 집집마다 걸려 있다. 고소한 냄새가 풍길 것만 같은 튀김 집 앞이다. 우리네 꽈배기 비슷한 것을 팔고 있다. 그런데 그 크기가 우리나라 꽈배기 두 배 쯤은 굵고 커 보인다. 한 입 먹으면 고소함이 압 안 가득 퍼질 것 같은 느낌에 침이 꼴깍 넘어 간다.

팔천협으로 가는 길에 만난 노천시장.

그 혼잡한 길을 겨우겨우 진입하던 버스가 반대편에서 오던 차들과 엉키면서 버스는 기어이 멈추고 말았다. 앞으로도 뒤로도 나 갈 수가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걷잔다. 시간 내에 도착하지 않으면 팔천협을 볼 수가 없단다. 이곳까지 와서 팔천협을 보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우르르 버스에서 내려 걷기 시작 했다. 계단만 아니면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날씨는 걷기 알맞았고 보이는 풍경은 아름다웠고 길은 깨끗하고 반듯했다. 개장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더니 그 말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기분 좋게 걷고 있는데 그 북새통을 어떻게 뚫고 나왔는지 버스가 우리 앞에 와서 섰다. 버스에 올라타고 조금 달리니 팔천협으로 들어가는 광장 앞이다.

표를 내고 통과하려니 통과하는 입구가 깔끔하다 못해 반들반들 윤까지 난다. 이제 개장한지 한 달이라더니 모든 게 깔끔하다. 사실 팔천협 이곳까지 오면서 통과했던 터널도 너무나 현대적이고 깔끔했었다. 꼭 우주영화에서 등장하는 시공간을 넘을 때 통과하는 불랙 홀 느낌이 났다. 불 수만 있으면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을 만큼 신이 났었다. 다시 전동차를 타고 유람선을 타러 갔다.

건기라 그동안의 여행에서 이렇게 풍부한 물을 만나지 못했는데 선착장에 도착하니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유람선이 영화 속 풍경처럼 다가왔다. 그 동안의 구경거리는 이곳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느낌이었다면 좀 과한 표현일까?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진정한 맛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다양한 지질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특히 협곡 안쪽에는 투명하게 처리된 벼랑 끝 하늘계단과 아시아 최고 길이인 2900m의 케이블카를 탈 수 있단다.

팔천협(八泉峡)은 한자에서 보듯 여덟 개의 샘물이 모여 흐르는 협곡이다. 팔천협 풍경구의 주 협곡은 총 13Km 이며, 면적은 170평방킬로미터라고 한다. 이곳을 고대 해양박물관이라고 지질학자들은 말한다. 고대해양박물관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3km에 달하는 래프팅 코스와 산림욕장 등 레포츠와 휴양을 한번에 즐길 수 있다. 요산에 자리한 불천사는 불교문화의 성지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종이 있다지만 그것을 다 구경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다. 구련산을 포기하고 가이드 말대로 팔천협에 들려 몇 군데라도 볼 수 있었다는 행운에 감사 할 뿐이다.

팔천협 계곡에서 탈 수 있는 유람선.

협곡을 구경하기 위해 유람선을 탔다. 구명조끼를 입고 자리에 앉으니 배가 유유히 협곡의 물위로 나아갔다. 양쪽으로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절벽위로 푸르른 하늘에 구름 몇 개가 떠간다. 새 한 마리가 이 쪽 절벽에서 저 쪽 절벽 위로 날아간다. 그 많은 산들을 다녔는데 이번 여행에서 새을 보긴 처음이다. 새소리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맑은 물, 깊은 골짜기가 어우러져 청명한 빛깔을 내뿜는 푸르름이 이곳에 있었다. 보고 또 봐도 실증이 나지 않는다. 행복에 취해 있는데 배는 어느덧 선착장에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걸어야 한단다. 약 1시간을 협곡을 걸어올라 산 정상에 있는 케이블카를 타야 한단다. 못 가겠다고 떼를 쓸 환경도 되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걸어야 한다면 뒤처지는 것은 싫다. 한 걸음이라도 남들보다 앞장을 서서 걸어야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부지런히 걸었다.

계곡물은 잔잔히 흐르다가 소리 내어 흐르다가 어느 순간에 작은 폭포가 되어 우리의 힘든 여정을 위로해 주었다. 걷다가 보니 계곡으로 빠지지 말라고 설치되어 있는 나무난간이 좀 차갑다고 느껴졌다. 살짝 두드려보니 나무가 아니라 시멘트 나무다. 깜박 속았다. 당연히 나무라고 생각한 것은 고목나무에서 보는 나뭇가지처럼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기 때문이다.

팔천협 계곡의 난간.

땀을 뻘뻘 흘리며 산 정상에 올라서니 케이블카를 타는 승강장에 도착했다. 이 케이블카를 무려 15분이 넘게 타는 것이란다. 산 몇 개를 케이블카를 타고 한 번에 건너는 것이다. 한 케이블카에 둘 씩 타고 산 구경에 나섰다. 발아래 한 뼘 길이의 길들이 구불구불 뱀처럼 산을 휘감고 있고 우리가 배를 탔던 계곡물이 실개천처럼 가늘게 보였다 안 보였다 를 반복한다. 태항산맥의 산들과 산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내 눈앞에 수묵화처럼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살다가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다시 내려가는 길이 펼쳐져 있다. 이게 나한테는 난코스다. 올라가는 거야 씩씩하게 잘 올라가지만 내려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릎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어차피 각오한 일. 다시 앞장 서서 씩씩하게 걷는다.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인 곳도 눈에 띈다.

끙끙대며 끝도 없이 이어진 계단을 내려오기 40여 분. 분명 올라 올때 보다 덜 걸었는 데도 힘은 배가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목적지에 도착하니 유리 천장이 걸을 수 있게 계곡에 설치 되어있다.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로서는 또 난감한 상황에 부딪쳤다.

사진을 찍겠다고 친구들이 올라오라는 성화에 엉금엉금 기어 다가갔다. 발 아래 유리창을 통해 끝도 없는 절벽이 보였다. 벌벌 공포에 떨며 사진을 찍고 나니 엘리베이터를 타란다. 길이 208미터(100층 높이)의 절벽을 22초 만에 내려갔다. 정말 눈 깜짝 할 사이에 팔천협 입구에 도착한 것이다.

허망했다. 그렇게 다리가 아프도록 걷고 또 걸은 길을 단 20초 만에 내려오다니…. 인생도 이런 것이었다. 돌아보면 아득한 세월을 앞 만 보고 달려왔다. 환갑을 넘어서고 보니 앞만 보고 달려 온 것이 때로는 허망한 생각이 든다. 남은 생이라도 천천히 걸어가며 들꽃도 보고 흘러가는 구름도 보고 때로는 바람 속에도 들어보며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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