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코노에 야마나미 올레길의 시작점에서 만나는 우케노구치 온천 마을은 우리나라의 신도시 주택가처럼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길게 이어진 마을의 길에서 만난 집들이 인상깊다. 하얀 레이스의 커튼으로 드리워진 창을 바라보면서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궁금해진다. 그 마을의 끝자락에서 생각하지 않았던 설국으로 노벨상을 받은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묵었던 온천을 만났다. 설국을 그곳에서 집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유명작품인 파천조(波千鳥. 나미치도리)를 이곳에서 구상했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 그는 한다고원을 '아름다운 꿈의 나라가 떠있는 듯 하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회색빛 거리에서 만난 온천의 분위기는 야스나리가 노벨상을 받던 그 시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한 느낌으로 짙은 비에 젖고 있었다. 1950년대 소설의 배경이 되어주는 것 같은 검은 목조건물 옆으로 작은 온천의 간판이 보인다. 따스한 온천의 김이 문을 열면 가득할 것 같은 목조건물을 바라보면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을을 벗어나 계곡을 따라 깊은 삼나무 숲이 잘 조성되어 있는 언덕을 오른다. 언덕 옆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숲길 아래쪽에서 계곡의 물소리가 깊게 들려오고 있었다. 삼나무 숲길을 지나자 한다고원의 아름다운 평지가 나타난다. 큐슈의 올레길 역시 제주도의 올레 길처럼 청색과 붉은색의 리본과 상징적인 말의 모습을 사용하고 있었고 화살표를 따라가도록 이정표가 이어진다.
고코노에 야마나미 올레길은 습지도 있고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미리 준비한 멜빵비옷을 입고 걷기 시작했다. 일본 역시 우리나라의 산간지방과 마찬가지로 평일이어서 그랬는지 올레 길을 걸으면서 만난 사람이 두어 명 정도였다. 올레 코스 중에 목장을 들어가서 쉬다가 가라는 안내문이 있는데 내가 걸어간 날은 휴일이어서 그랬는지 목장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질퍽한 습지를 만나기도 하였고 화산지역이라 그런지 걸어가는 진땅 위의 검은 흙이 꼭 말이나 소의 배설물로 느껴지기도 하여 풀 위로 살짝 살짝 피해 걸었다. 걷다가 만나는 먼 산의 풍경과 들판이 순간순간 그 느낌들을 잊게 할 만큼 올레에서 만나는 길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다행스럽게도 일기예보는 살짝 어긋나서 길을 가다가 햇살이 살며시 드러났다. 순간 아름다운 들판의 정경을 보여주기도 하다가 다시 또 안개같은 비를 내리기도 하였다. 오히려 비에 젖은 초록의 들판이 짙은 녹색으로 물기를 머금어 그 빛의 선명도를 더하고 있었다. 먼 곳에서 찾아온 방문객을 위한 하늘의 배려라는 생각을 했다.
걸쳐 입은 우의가 땀으로 젖어가고 있었으나 나는 그 습기를 개의치 않았다. 나와 동행한 젊은이는 그 젊음이 주는 대로 가끔 나를 확인하면서 앞서서 걸어간다. 오히려 말 없이 길을 걸어가는 것이 도움이 되어주었다. 낯선 길을 걸어가면서 작게 다가오는 바람 한 점이 감사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고 걷고 싶었던 길을 걸어갈 수 있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발이 습지에 빠지기를 수 십 번.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하는 폭우에 여름용 등산화 속에서 발은 물에 불어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불은 발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젖은 발이 신발의 바느질 결을 견디지 못하고 상처가 나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해 간 밴드와 스포츠밴드로 발을 감싸기 시작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미 물집과 상처가 생긴 발은 숙소에 도착해 온천물에 발을 넣자 신음을 내게 할 만큼 꽤 여러 군데의 상처를 만들었다. 마치 전쟁터를 다녀온 용사 같은 마음이 되어 발에 덕지덕지 스포츠 밴드와 파스를 붙였다. 내 나이에 큐슈 올레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에 스스로 칭찬을 하면서 꿈같았던 정경과 한다고원의 아름다운 풀밭에서 만났던 작은 바람과 햇빛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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