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저서원(牛渚書院)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년)을 모신 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없어지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경기도에 속한 12개의 서원 중 하나이다.
1648년(인조 2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포출신으로 통진(通津) 현감으로 있으면서 유생을 훈도한 조헌(趙憲)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1669년경 김포유생이 청액소(請額疏)를 올려 사액을 청하였지만, 당시 한참 서원의 과도한 설립에 따른 폐단이 논의되던 때라 실현을 보지 못하였으며, 1675년(숙종 1)에 충절장려책의 목적으로 ‘우저(牛渚)’라고 사액 되었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의병장으로 알려진 조헌 선생은 원래 문신으로 정철과 함께 서인 측 강경파로 분류되며, 도끼를 가져가 강력하게 주장하며 상소를 올리는 이른바 '지부상소'(持斧上疏)로 유명하며 벼슬에서 물러나서도 전쟁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다가 마침내 임진왜란이 터지자 직접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의 승병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였고 금산전투에서 끝까지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700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여 7백의총(義塚)에 묻혀있다.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임진 4 충신으로 불린다.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고,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었다. 옥천 표충사(表忠祠), 배천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 되었으며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렇듯 도끼 상소로 이름날 만큼 과격하기까지 한 조헌은 절의와 도학을 겸비한 학자로서, 평생을 강의(强毅)와 직언(直言)으로 일관하였으며, 학문에는 이론보다도 실행(實行)과 실공(實功)을 지향했다. 그의 사상과 행적은 조선 후기 서인계 학파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의리 사상으로 전개되어, 병자호란 때의 김상헌(金尙憲)이나 송시열(宋時烈), 그리고 한말의 최익현(崔益鉉) 등이 모두 그를 숭상했다.
의병장으로 전사하여 무인처럼 생각되지만, 그는 공자를 모신 문묘에 배향된 동국18현(東國 十八賢)에 포함될 만큼 학덕이 높고 뛰어난 학자로 추앙받는 사람이다. 또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초개같이 던진 위대한 애국자이다.
동국 18현(東國 十八賢)
동국 18현(東國 十八賢)은 동방 5현(東方 五賢)과 함께 학덕이 높은 학자들을 일컬을 때 많이 쓰이는 말이다.즉, 동국 18현은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에 함께 모신 학덕이 높은 우리나라 인물 18인을 말하는데 시대별로 신라의 설총, 최치원, 고려의 안향, 정몽주, 조선의 김굉필, 조광조, 이황, 정여창, 이언적,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김인후, 조헌, 김집을 말하며 위 18인 중 조선 시대 성리학을 이끈 대유학자 5명, 즉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동방 5현이라고 한다. 여기서 보듯이 중봉 조현 선생은 당당히 동국 18현에 포함되어 후세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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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저서원은 조헌 선생의 생가터에 세웠는데 1617년에 조헌 선생 유허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0호)를 먼저 세웠고, 그보다 늦게 1648년에 서원을 지었다. 생가터에 세워서인지 일견 옹색해 보이지만 그래도 작고 아담한 규모이다.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이나 다른 서원들처럼 우람한 은행나무는 보이지 않으며 이를 대신하여 서원주변으로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어 학림(學林)을 이루는 데는 손색이 없어 보인다.
대원군의 훼철에도 살아남았다고는 하나 최근까지 보존상태가 썩 좋지는 못하였으며 1973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헌 선생이 의병들과 함께 묻힌 7백의총(義塚)
1592년 8월 18일 조헌과 승병 영규대사의 연합의병 700여 명이 왜군과의 금산전투에서 전원 순절한 후 4일이 지나 조헌의 제자 박정량(朴廷亮)ㆍ전승업(全承業) 등이 시체를 거두어 하나의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총이라 하였다.
1603년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峯趙憲先生一軍殉義碑)가 세워지고, 1634년(인조 12) 순의단(殉義壇)이 설치되어 제향을 올렸다. 그 뒤 1647년 종용사(從容祠)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1663년(현종 4)에 ‘從容祠’라는 사액(賜額)과 4결(結)의 토지를 내려 춘추제향에 쓰게 하니, 순의단이 설치되면서부터 각 지방수령과 유생의 성금과 의연금이 답지하여 옆에 종용당서원(從容堂書院)도 세워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는 일본인들이 진화사(進化社)를 만들어 사우(祠宇)와 의총을 허물고 일군순의비를 폭파한 뒤 제토(祭土)를 강제로 팔아버렸으며, 광복 후인 1952년에 군민이 성금을 모아 의총과 종용사를 재건하였다. 1970년 국가에서는 경역을 2만 2,800평으로 확장하고 종용사, 기념관, 순의탑 등을 새로 지어 사적 제105호로 지정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유학자 조헌 선생과 스님인 영규대사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순국하고 한 곳에 묻힌 사실이다. 700 의병들과 함께 묻힌 그분들의 순국에 새삼 고개가 숙인다. 멀지 않은 금산군 남이면에 보석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 초입에 영규대사를 기리는 의병승장비가 세워져 있으니 이곳 김포 우저서원에 세워진 조헌 선생 유허 추모비와 함께 한 번쯤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의 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의 꿈이 사라지다
조선의 서원중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 전북 정읍의 무성서원,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 등 대표적인 9개 서원을 추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려던 우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2012년 등재추진단이 결성되고 9개 사원을 묶어서 등재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작년 유네스코 측의 현지 실사 등의 결과 "해당 서원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 알 수 없고 서원 건축물뿐 아니라 주변 자연경관이 함께 보호·관리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권고를 받았으며, 올해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최근 유네스코에 제출한 평가 보고서에서 3등급인 '반려(Defer)' 판정을 받아 등재가 불투명해지자 본심사에서 탈락하느니 자진 철회하기로 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무척 아쉬운 일이다.
현재 한양도성은 물론 조선왕실의 태실 등 추가적인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노력을 각계에서 벌이고 있는데 더욱 더 치밀하고 완벽한 준비로 차질없이 진행되고 반드시 세계유산에 등재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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