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은 가을이 이제 막 시작되는 듯했다. 곶자왈은 여름을 놔주지 않으려는 눈치였다. 높은 산이든 낮은 숲이든 제주의 자연은 아직 초록이 더 많았다. 정신없이 사느라 서울에서 놓친 계절 속으로 즐거이 빨려 들어가게 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비바람으로 일렁이거나 햇빛으로 반짝이거나 그 푸름이 펄펄 뛰었다. 내 몸과 마음을 싱싱하게 만들었다. 11월 중순으로 접어드는 때,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제주여행에서였다. 30년 만의 이사를 전후해 지난 2달여 지칠 대로 지친 내가 내게 준 부담 적은 선물이었다.
1주일을 작정했으니 바쁠 게 없었다. 성산 일출봉이며 광치기 해변, 섭지코지, 수월봉, 차귀도, 산굼부리, 축제 등 다 꼽지 못할 만큼 이곳저곳을 슬슬 쏘다녔다. 마침 물이 빠진 광치기 해변에서는 자생하는 문주란들이 먼저 눈에 뜨였다. 이파리 밑에 알밤 같은 게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처음 본 문주란의 열매였다. 해변에 널린 현무암들은 녹색 이끼로 덮인 건 녹차 케이크, 이끼 없는 건 초콜릿 케이크 같아 보였다. 섭지코지에는 예전의 성당 대신 동화 속 과자로 만든 집 모양이 서 있어 낭만을 선사했다. 어찌나 비바람이 세찬지 우산도 소용없었다.
퇴적하는 지층 위에 화산암괴나 화산탄이 떨어지며 주머니 모양을 새겨서 지질구조가 특이하다는 수월봉. 가슴 시린 설화도 지니고 있었다. 수월이와 녹고 오누이는 엄마의 병을 고치려고 99가지 약초를 구했다. 마지막으로 수월봉 중턱에서 오가피를 캐다가 그만 수월이가 바다에 떨어지고 만다. 동생을 잃고 슬퍼하다 세상을 뜬 녹고의 눈물이 수월봉 밑 바닷속 샘물이 되어 다시 솟아오르니 녹고샘이라들 했다. 수월봉 절벽은 수월을 그리며 바다를 바라보는 녹고의 옆모습을 닮았다 해서 녹고모루라고도 부른다는 얘기다.
몇 번 제주를 찾긴 했어도 올레길을 걸으려 작정하고 왔을 때 외에는 일 또는 세미나 참석차여서 설화까지 귀에 담기는 처음이었다. 성산이 일출이라면 차귀도는 일몰이 장관이란다. 방파제며 해변에는 이제 막 지려는 해를 향해 주둥이 긴 카메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홍시보다 더 붉은 해는 황홀하게 스러지는 자태를 감히 쉬이 보려 하느냐는 듯 보여줄락 말락 하다가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스름해지면서 여기저기 카메라 삼각대들이 하나둘 거둬지고, 온종일 줄에서 펄럭였던 준치들도 아낙 손에 거둬지고 있었다.
돌담위에 수북한 귤
세계 유일한 평지 분화구라는 산굼부리에서는 무성한 억새만 볼거리였을 뿐 예전과는 달리 정작 분화구를 한눈에 보기 어려웠다. ‘(주)산굼부리’라고 작게 쓰인 간판을 보자니, 공원처럼 변한 곳에 입장료는 비싸고, 사람은 바글거리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누구에게나 거저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수월봉이나 곶자왈, 그리고 사방의 바다가 더욱 감사하게 느껴졌다. 올레길과 한라산 트래킹 코스는 말할 것도 없었다. 시즌이 지나선지 거의 나 홀로 걸었을 만큼 한적한 길 위에 내 가슴속 짐들은 조금 조금씩 내려졌다.
이번에 걸은 올레길은 16코스와 17코스였다. 하필 비바람이 거센 날 이호태우 해변과 제주공항 뒤편, 용두암 등을 지나는 17코스를 돌았다. 날려갈까 두려울 정도의 비바람보다도 이따금 길을 잃어버리는 나의 ‘길치’가 문제였다. 길을 못 찾을 때는 마지막 표식으로 돌아와 다시 찬찬히 찾으며 가라고 한다. 그럼에도 표식이 보이지 않으니 어쩌랴. 올레길 표식인 파란색과 주황색의 두 가닥 끈은 더러 색이 바래고 나뭇잎에 가려 잘 보이질 않았다. 그것도 꼭 어둑한 숲 속에서 환한 길로 나왔을 때나 갈래 길에서 어리둥절한 순간에.
‘가지 않은 길’에서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노란 숲속에 난 두 길을 다 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풀이 더 있고, 사람들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할 길”을 택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걸었을 듯 뵈는 더 넓고 반듯한 길의 유혹에 빠져 표식을 놓치고 말았다. 이럴 때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최고이련만, 귤밭을 숱하게 지났는데도 좀체 사람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트럭을 세우고, 저 멀리 밭일을 하는 할머니를 외쳐 불렀다. 일이 바쁠 텐데도 어찌나 친절하게 길을 일러주고 염려까지 해주는지 기운이 쑥쑥 났다.
다음 날 16코스에서 길을 잘못 들었을 때는 제주 인심에 감격했다. 이미 다리는 무겁기만 한데 한참을 되돌아가야 했다. 주저앉아있자니 눈앞 귤밭의 낮은 돌담 위에 귤이 수북했다. 가지며 이파리가 함께 달린 걸 보면 일부러 따서 얹어놓은 게 아닐까. 길 잘못 든 사람이 종종 있더라, 이거 먹고 기운 차려서 가란 듯했다. 두 개를 단번에 까먹고 정말 기운을 차렸다. 종일 걷자면 한두 개는 가져갈까 하다가 말았다. 나도 귤 밭 주인처럼 누군가 나 같은 사람을 배려해야지 싶었다. 마을 길에서 마주친 아줌마는 피곤하겠다며 단감을 건넸다.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길에서 만난 사람은 고맙고 반가웠다. 길을 잃었을 때는 더했다. 한편으로 무서운 것도 사람이었다. 전혀 사람이 없어서, 어쩌다 있어서 무서웠다. 16코스 중 수산봉에 오르기 전 저수지를 지나는데 홀로 낚시하던 남자가 자꾸 쳐다봤다. 어둑한 숲에서 밝은 도로로 나오기까지 자꾸 뒤가 댕겼다. 여자 혼자 걸을 때 미리 연락해 놓는 올레 전화도 있던데, 괜히 무시했나. 퇴직 후 제주에서 새로 직장을 가진 친구의 집에 머물고 있어서 혼자라는 느낌이 별로 안 들었던 탓이었다. 덕분에 힘든 줄도 모르고 재빨리 봉우리를 넘을 수 있기는 했다.
주말에는 친구와 함께 다녀 마음이 편안했다. 아침과 저녁으로 요리를 해주는데다 샌드위치까지 싸준 친구에게 맛난 점심을 사줄 수 있어서 더 그랬다. 가족에게 늘 해주다가 받아먹기만 하는 게 편치 않은 나였다. 친구는 주중에 홀로 다니는 나를 좀 더 챙겨주고 팠겠지만, 한주 내내 붙어 다녔다면 티격태격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친구는 물론이고 가족조차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안 되는 게 사람과의 관계이니 말이다. 떠나올 때 적지만 숙박비랍시고 내놨더니 친구는 펄쩍 뛰었어도 억지로 떠안기길 잘한 것 같다.
돌아와서 집 근처의 길 탐색에도 나섰다. 이사 온 후 처음이다. 의외로 걷기에 아름다운 길들이 이어졌다. 올레길을 헤매다가 걷다가 하고 와서인지 이 골목 저 골목 들어서기에 거침이 없었다. 길을 물어보다가 카메라를 든 일흔 초반의 이웃 아줌마를 만났다. 1년에 두 번씩 동영상 디스플레이도 한다면서 이 동네에서의 즐길 거리와 배울 거리를 알려준다. 길을 나서면 길을 만난다. 무엇보다 사람을 만난다. 홀로 길을 가도 혼자가 아닌 까닭은 사람을 만났거나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엔 아직도 좋은 사람들이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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