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너드 코헨이 마지막 가을 낙엽을 밟으며, 그만의 2016년 세계로 떠났다. 며칠 동안 그의 노래 'Waiting for the miracle'와 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25년 전 늦가을, 월요일 아침이면 서울에서 대덕연구단지까지 가는 기차를 타며 들었고, 연구소 기숙사에서 연구동까지 걸으며 들었던 목소리. 기적을 기다리는 늦가을 낙엽들이 서로 몸을 부비는 소리를 닮았었다.
그가 데뷔하면서부터 그의 음악을 40년 가까이 즐겨 들으며 따라 흥얼거렸다. 그러나 그가 부른 '기적을 기다리며'는 감히 곁에도 가지 못하는 노래였다. 그가 바라는 세계와 달라서 그럴 것. 그러나 이제는 따라 부르고 싶어진다. 이제 그의 세계는 더 이상 새롭지 않으니, 그래서 내가 부르는 지금 이 시간이 새로운 세계일지도 모르니 하는 생각에서다.
어쩌면, 나는 나만의 기적을 바라며 시간을 보내왔는지 모른다. 여전히 다음 시간 숨 맛은 더 좋을 거라며…. 그러니 반드시 오늘은 기적이 일어날 거라며…. 보이는 곳, 아니 보고 싶은 저곳까지 산책하곤 했었다. 오늘도 내가 살아있는 일이 곧 기적일 거라며 중얼거리다 걷다가 하늘도 봤다.
또 어쩌면, 많은 사람 모두 자신의 세계로 가는 기적을 위해 사는 것이고 구름에도 말을 걸어봤다. 그래서 자신만의 기적이 꼭 한 번 일어났으면 하는 것. 이도 또한 기적이겠지만. 고의든 아니든 분명한 것은 내가 곧 아름다움이라고 말해 봤다. 보이는 것 모두 아름답기에, 그때마다 웃는 일이 기적이라고 물어도 봤다. 구름은 대답이 없었다. 그냥 맞아, 하고 대답하기 기다리며 걸을 뿐.
사람마다 아름다움이 다르니, 서로 비교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기적에도 차이가 있을까? 억지로라도 숫자를 붙여봐? 사람마다 사용하는 시간이며 움직임이 서로 다르니, 기적에도 차이가 있을까? 엉뚱함이 슬쩍 헛웃음을 짓게 한다. 그러나 아니다.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절대 등급, 그래 나만의 기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기적이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으리라. 매 순간 맞이하고 보내는 시간이, 한순간 멈춰 서서 ‘너의 기적은 이것이다’ 라며 모든 것을 정지시키지만, 그 ‘내 순간’을 잊고 지나치느니 어찌할 것인가? 아니, 나는 기적을 내 안에 웅크리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더 크게 일어나라며 꽉 누르고 있는 것. 그것은 결국 내 욕심일 것.
나이들수록 기적에 대한 해석이 구체화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보다. 내 것을 내려놓는 기적. 다른 사람에게 모두 내어주는 기적. 그래서 내 안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기적. 하, 욕심일까? 욕심이란 이렇게 끝도 한도 없는가 보다. 살아있는 일 자체가 욕심과 기적이 공존하는 듯도 하다. 욕심을 부리다 기적을 일으키는 일이 또 오늘 일?
이런 예는 또 어떨까. 매일 한 끼 먹는 것에 감사하는 일. 밤에 드는 잠에 감사하는 일, 가깝게 마주할 수 있는 사람에게 감사하는 일. 이러한 글을 남기는 것에 감사하는 일 등등. 이러한 일이 곧 기적이라고 외치면 어떨까. 레너드 코헨도 ‘내가 바라던 기적이다’ 라며, 저 세계로 가는 길이란 평범한 마지막 기적이어야 한다고 했을 것. 그래, 지금 살아있는 우리가 아주 작은 일에 감사하는 일이 기적이라며 웃으면 어떨까.
코헨, 그도 평소 기적이 꼭 한 번 일어나길 바랐을 것이다. 결국, 그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기적을 기다리며’를 부를 때마다 자신을 버리는 연습을 했을 거다. 그렇게, 그는 그가 바라보던 그만의 세상으로 떠났다. 연습하던 대로 자기 자신을 미련없이 버리고, 마지막 낙엽 하나 주워들고 개울 건너듯 하늘을 훌쩍 건너뛰었다. 그렇다. 나를 버리는 일이 가장 멋진 기적이다.